소영이와 나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갈색 단발머리에
흰 피부,
안경(지문이나 눈물자국이 묻어 있는)을 쓴
열 살 때 친구,
소영이는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우리 집 앞에는 기찻길이 있었고 소영이네 집과 우리 집을 잇는 길이 따로 있었는데 소영이는 어쩐지 기찻길을 따라 우리 집에 오는 걸 좋아했다.
그날 소영이의 안경에는 흰색과 검은색과 고동색이 교차하는 기다란 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너 안경에 뭐 묻었다.
내가 말하자 소영이는 대수롭지 않게 안경을 슥슥 닦아냈다.
-아, 아마 참새 똥일 거야. 참새를 보다가 그런 것 같아.
기찻길에서 우리 집 쪽으로 내려오는 지점에는 탱자나무가 있었는데 참새들은 탱자나무 사이에 들어가 있기를 좋아했다.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소영이는 탱자나무 앞에서 참새들을 오래도록 구경했을 것이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놀란 참새들이 한꺼번에 탱자나무에서 나올 때 그런 일이 생겼을 것이다.
소영이는 무엇이든 가만히 관찰했다. 쭈그리고 앉아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세히 보았다.
개미, 쥐며느리, 땅강아지, 집게벌레, 별꽃, 냉이꽃, 큰 개불알풀, 강아지똥풀, 클로버, 민들레..
종류도 가리지 않았고 때도 가리지 않았다.
어떤 날에 소영이는 나를 데리고 남의 집 대문 앞으로 갔다. 대문 옆으로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울타리 너머에는 잘 가꿔진 꽃밭이 있었다.
소영이는 대문 밖에 핀 과꽃을 한 아름 땄다.
- 꽃을 꺾는 거야?
-응. 우리 꽃다발을 만들어 보자.
-근데 이거 꺾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저 안쪽에 피었던 꽃의 꽃씨가 밖으로 날려서 여기에도 꽃이 핀거야. 이 꽃들은 주인이 따로 있지는 않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소영이를 따라 꽃을 꺾었다. 마침 주인이 나와서 우리를 보았지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꽃을 딴 소영이가 다시 나를 데리고 기찻길을 넘어 들판으로 갔다. 가을풀이 길게 솟아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영이는 손으로 휘휘 저으며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풀들을 눕혀 자리를 만들었다. 소영이가 먼저 앉았고 소영이를 따라 앉으니 세상에는 우리와 풀들과 하늘만 남게 되었다.
소영이는 가방에서 가위와 리본을 꺼냈다. 우리는 오래도록 앉아서 꺾어온 과꽃으로 꽃 뭉치 하나씩을 만들어 냈다. 서로 만든 것을 바꿔보며 감상할 때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가야겠다.
해가 더욱 기울어 어두워지기 직전 소영이는 일어났고 나도 따라 일어나 우리들의 세상에서 나왔다. 기찻길을 다시 넘어 집으로 돌아올 때 이른 별 하나가 하늘에서 반짝거렸다. 어른이 된 나는 지금도 가끔씩 소영이가 만들어 주었던 풀과 꽃과 하늘과 소영이와 나 밖에 없었던 세상을 생각한다.
그날 소영이가 내게 주었던 것은 과꽃뭉치가 아니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11살 여름이 시작될 때 소영이가 이사를 갔다. 나는 특별한 인사 없이 소영이를 보냈고 9월이 되자 소영이가 멀리 떨어진 자기네 집으로 초대했다.
소영이의 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던 소영이의 아빠는 내게
-우리 집에는 뻐꾸기시계가 있단다.
했다.
그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소영이는 아빠에게 괜스레 신경질을 냈다. 뻐꾸기시계가 유행하던 때였다.
나는 소영이의 방을 구경하고 소영이의 동네를 둘러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질 때도 별다른 인사 없이 헤어졌다.
그 후로 몇 번 통화를 하다가 하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전화번호를 잊어버려 영영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겐 소영이의 빈자리가 몹시 컸지만 이사 간 소영이는 내가 잘 모르는 동네에서 그토록 원하던 고양이를 키우고 정시가 되면 울리는 뻐꾸기의 소리를 들으며 잘 살고 있었다.(그런 것처럼 보였다.) 밤이 되면 침대가 있는 자기만의 공간에 들어가 잠을 잘 것이었고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을 것이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소영이와 통화할 때면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너만 한 친구가 없다고. 다시 오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 흐르다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그래서 소영이와 통화를 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고 어쩌면 나는 일부러 전화번호를 잊어버렸는지 몰랐다.
아직 11살이 되기 전에, 소영이가 이사 가기 전, 우리는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함께 다녀온 적이 있었다.
작은 걸음으로 걸어가기에 옆 동네는 멀었고 가는 중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마침내 친구 집에 도착했지만 친구는 비가 와서 놀 수 없다고 우리를 거절했다.
그 친구집 앞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연 잎이 저수지 안에 가득했다.
소영이가 연잎을 하나 따 왔다.
-연 잎은 물에 젖지 않으니까 우산으로 쓸 수 있어.
연 잎으로 내 머리를 가리는 동안 소영이는 연 잎을 하나 더 따와서 자기 머리 위에 우산처럼 썼다.
둘이서 연잎 우산을 하나씩 들고 연 꽃구경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길 모퉁이에는 오는 길에 보지 못했던 파란 수국이 커다란 송이를 이루고 있었다.
친구에게 거절당했지만 내 옆에 소영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공기가 차갑지 않았다.
너만 한 친구가 없다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말을 하면 그다음의 내 마음을 정말로 어쩌지 못할까 봐 두려웠었다.
사 십 살의 내 몸통엔 점점 점이 많아지고 있다.
속옷과 옷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내 몸통. 팔과 다리를 이어주고 목을 연결해 세상에 나를 내 보내는 몸통은, 지도처럼 좌표를 찍어 놓았다.
거쳐간 곳이 많았고 거쳐간 곳이 많았다는 것은 이제 거기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사주는 내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사주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다. 이제는 가끔 시공간이 나를 무엇이라 해석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사주를 들여다본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내 몸이 아니다. 나의 애정이다.
내 몸은 애정이 지나온 자리마다 무수한 좌표를 찍어 놓은 것 같다.
소영이에게 느껴졌던 애정과 그리움은 다른 점들과 함께 곳곳에 찍혀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겪었던 무수한 감정과 기억의 파편이 내 몸에 저장되어 있는 것처럼 어느 날 서랍이 열리고 옛 일이 촤라락 펼쳐진다.
때때로 나는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헤매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되풀이하여 본다.
때때로 아빠의 등에 매달리고 엄마의 품에 파고든다.
그리고 소영이와 길을 걷는다. 소영이와 앉아서 과꽃 뭉치를 만드는 곳에는 나와 소영이 밖에 없다. 온 세상은 풀과 하늘뿐이다.
나는 아직도 소영이가 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수국을 가장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