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다시 읽힌다
기자로서 처음 집중해서 취재했던 건 노동조합 설립 이슈였다. 굴지의 A 기업은 그간 노조 없는 문화를 자랑스레 여겨왔고, 노조에 가입할 거면 차라리 회사를 나가라는 분위기를 공공연하게 조성했다. 그런 기업에서 힘든 투쟁 끝에 노조가 처음으로 생겼으니 얼마나 관심이 집중됐겠는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기사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신입기자였던 나는 알리고 싶었다. 왜 수십년 만에 노조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간의 과정은 어땠는지. 누군가 한번쯤은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약속을 잡고 노조 위원장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큰 환대를 받자, 그만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구나 했다. 이후 노조 설립 외에 내부 이슈를 취재하다 A 기업의 입장도 듣게 되었다. 기사가 나가자 기사에 대응한다며 A 기업 관계자는 다급하게 회사 근처로 나를 찾아왔다. 대화 중간쯤 됐을까,
"기자님 혹시 법 공부 하셨어요?"
"네 근데 그걸 왜...그리고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은 우리가 이렇게 대응을 하면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거든요.
그런데 기자님은 다른 법조문도 이야기 하시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혹시나 해서..."
A 기업 관계자는 나를 치켜세우면서 한 수 배운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꼬박 열흘 전, 한 기자 선배는 나에게
"기자가 늦게 된 걸 후회 안해? 좀 일찍 됐다면 지금보다 기회도 많았을테고 너를 알릴 기사도 더 많이 썼을 거 아냐"
나의 기자로서의 잠재력을 칭찬해 준 선배였기에 나름 인정의 표현이었지만, 역으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자책감 역시 들어 한동안 기분이 가라앉았다. '죽을동 말동 열심히 하든가, 아니면 깨끗이 포기하든가. 난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시간만 오래 낭비했어'.
그랬는데, 열흘 후 법 공부를 한 나의 이력이 한 기사를 통해 '격려'를 받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멀리 돌고 돌아온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의미없던 시간들이 아닐 수도 있겠어.
쓸모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날 이후로 조금은 시간적 관점에서 여유가 생겼다.
또 모르지. 지금 이 경험, 감정들이 훗날 어떻게 쓰일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