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뒤집히기에 충분한 시간
2025년 5월 20일 화요일.
서울의 한 종합병원 입구에서 엄마를 만나기로 했다. 이날 대장 용종을 떼기로 한 엄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안심했다. "에이 엄마 뭐그리 겁을 먹어" "그렇지? 어제 종일 금식했더니 힘이 없네" "내가 근처 맛집 찾아놨어. 2시에 용종 떼러 들어간다고 했지? 잘 마치고 몸보신하러 가자"
용종 하나를 떼러 이 큰 병원까지 와야하나 싶었지만 동네 병원이 종합병원을 권했기에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자, 긴 대기실 의자 끄트머리에서 아까부터 부둥켜안고 울고있던 중년 여성 두 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잘 해결될 거에요. 제가 기도할게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했다.
종합병원은 올 때마다 희한하게 그동안 눈감고 있던 진실을 새삼스레 각인시켜준다, 결국 내 인생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생과 사' 이 둘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생과 사를 다투는 이에게 삼계탕 마라샹궈 펜트하우스 스위스여행, 그리고 조금 전까지도 나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그 걱정거리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초록색 수술복을 그대로 입은 한 간호사가 난데없이 소리치며 나를 불러댔다. "박민애씨 보호자분, 보호자분 어디계세요!!" "네, 저 여기 있어요"...허겁지겁 수술실에 들어간 나에게 용종을 떼던 의사는 내시경 화면을 보여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대장암이 의심돼서 보호자분을 불렀어요. 보시면 여기, 이건 일반 용종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출혈도 심해서 오늘 입원해야 돼요. 바로 조직검사 보낼게요" "아...네...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다시 그 긴 대기실 의자로 돌아왔다. 나도 그 중년 여성분들처럼 하염없이 울고 싶었다. 부둥켜안을 사람은 없었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나의 이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은 누구도 덜어주지 못했으리라. 작년에 아빠를 하늘나라에 보냈는데...어떡하지...도와주세요...
간호사는 오후 5시에 엄마가 병실로 이동할 거라고 했다. 2시부터 앉아있던 그 대기실 의자를 나는 5시까지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은 채 엉덩이를 꼭 붙여 앉아있었다. 정각 5시 회복실에서 나온 엄마에게, 입원 소식에 놀랐을 엄마에게, "걱정하지마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다 잘될거야"라고 말해주며 밝게 웃었다.
보호자 면회가 허락되는 시간까지 엄마 병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밤 길에 생각했다.
"맛집은 무슨... 몸보신은 무슨!!.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고작 3시간 뒤에도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어제 계획했던 오늘 점심 메뉴를 그대로 맛있게 먹게되는 게 정말 큰 특권이고 감사한 일이었구나. 내일이 나에게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하루의 '허락됨'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해 온 요즘이었다. 그런데 이날 이후로 방점을 다른 데 찍기로 했다.
'매 시간'의 허락됨.
시간을 아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