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에두꺼운 얼음덮혀있지만,바위 사이로흐르는 계곡수가홀로 잠에서 깬 듯 봄을재촉하는노래를 부른다.
고도가 오를수록 쌓인 눈이 점점 두터워진다. 아이젠 없이 등산스틱 힘을 빌어 간신히 올랐지만, 이젠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등산화로 철계단 난간을 툭툭 차며 눈을 털어내고,아이젠을 채워보지만 쉽지 않다. 발크기보다 여유가 많은 동절기 등산화라 아이젠을 찰 때는 늘 힘겹다.
눈 위엔 두세 명 오르내린 발자국뿐이고, 인기척 없는 고요함이 길게 이어진다. 주말인데 국립공원 등산길에 산객들이 이리도 없을까.
철계단이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계곡을 지나 남대봉과 상원사로 나눠지는 삼거리까지 올라왔다.
안내목이 상원사오백미터, 남대봉까지는칠백미터를 가리킨다.
절을 구경하려면 언덕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지금 못 보면 또 언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상원사로 향한다. 다행히 눈이 많지 않아 계곡길과 달리 걷기가 수월하다.
상원사는 꿩의 보은설화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어릴 적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난다.
한 젊은이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이었다. 젊은이가 적악(현재 치악산)고갯길을 넘고 있을 때, 꿩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 옆 바위 밑에서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알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꿩들을 잡아먹으려 둥지를 응시하고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 꿩이 이를 지켜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젊은이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벗어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구렁이 몸에 명중되고 구렁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위기를 넘긴 어린 꿩들은 날개를 퍼드덕 거리며 어미에게 다가갔고, 울부짖던 어미꿩은 고맙다는 듯 '꿔겅 꿩' 소리 내며 날아올랐다.
꿩을 구해준 젊은이는 고갯길을 서둘러 걸었으나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자 하룻밤 묵을 곳을 찾던 중 산속에서 기와집 한 채를 발견하고 그 집에서 들어가게 되었다.
젊은이는 소복차림의 젊은 여인으로부터 밥까지 얻어먹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가슴이 답답해 눈을 뜨니 큰 구렁이가 젊은이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구렁이는 "당신이 오늘 내 남편을 활로 쏴 죽였소. 남편도 전생에는 사람이었는데 벌을 받아 구렁이가 되었소.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당신을 이곳으로 유인했으나, 산 위 빈 절 종각에 있는 종을 자정까지 세 번 울리면 당신을 살려주겠소."
젊은 이는 이젠 죽었구나 낙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땡 땡 땡 세 번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가 나자 구렁이는 젊은이의 몸을 풀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날이 밝고 젊은이가 종각에 올라보니 종각 밑에 꿩 두 마리가 머리가 깨진 채 죽어있었다.
젊은이는 말 못 하는 날짐승이지만 죽음으로 보은 하였으니, 내가 그 영혼을 달래주어야겠다며 과거시험을 포기한 채 꿩들을 묻어주고, 절을 고쳐짓고 거기서 살았다.
그 절이 바로 상원사다. 그때까지 단풍색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던 산 이름도 붉을적(赤) 자 대신 꿩 치(雉) 자를 넣어 치악산(雉岳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솔길을 잠시 내려가니 언덕 위에 사찰이 나타난다. 절벽 끝부문에 종각으로 보이는 누각이 두드러져 보인다. 처음 보는모습이지만 "꿩 설화가 전해지는 그 종각이겠구나." 짐작적으로 알아차린다.
계단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드니, 눈앞으로 보이는 전망이 시원하게 탁 트였다. 멀리까지 거침이 없다. 이렇게 높고 전망 좋은 사찰이 또 어디 있을까.
상원사
날씨가 흐린 탓에 앞으로 보이는 조망이 선명하지 않지만 탁 트인 전망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남대봉으로 바로 가지 않고 언덕길을 내려온 수고스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꿩을 구해준 그 젊은이처럼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깊은 산속 적막한 사찰에서 밤을 지새우면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그런 귀신을 만날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리따운 귀신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사찰 앞에 쫙 깔린 운해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는 명품일 것이다.
상원사에서 맞이하는 일출을 상상하며 정상으로 향한다. 해지기 전에 남대봉 찍고 주차장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