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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에도 바닥은 있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두려움

by 제롬

깊은 바다를 마주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끝도 없는 무엇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의 두려움보다 끝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상담사는 '마주하지 않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두려움이든 슬픔이든 불안이든 무엇이든 변화하고 싶다면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지난 두려움들이 모두 모여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이제 도망가거나 돌아가거나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 소모하였고 더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하지 못할 일이나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깊은 두려움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깊은 바다가 나를 안고 있는 듯 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서인지 내 앞에 놓은 깊은 바다는 실체가 있어 보여 좋았다. 실체가 있는 두려움 앞에 나는 고요해졌다.


마스터에게 더 깊이 가보겠다는 수신호를 하고 나는 15m에서 수심 30m로 내려갔다. 수심은 실제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팔목에 찬 다이빙컴퓨터가 수심을 나타내주었지만 그리 실감 나진 않았다. 바닥이 과연 있을까? 이 바다의 끝이 있을까? 이내 까만 바다 아래로 뭔가 형체가 보였다.


땅이라고 하기엔 안 맞을 것 같지만, 꼭 해안가 바닥을 닮아 있었다. 조개들이 잘게 잘게 부서져 마치 흙이나 모래처럼 깔려 있었다.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작은 돌이 되어 모래가 되기까지 셀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겠지. 그 위에 물고기들이 산호를 집 삼아 자리 잡고 있었다. 새우도, 니모도, 바다장어도 때때로 바다거북이도 지나갔다.


수심 30M 바닷속의 작은 물고기 마을. 제롬


이 깊은 바닷속에서 너희는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그 길을 지나오면 물고기마을이 자리 잡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렇게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겠지. 삶은 그렇게 모르는 길에 대한 두려움을 주지만 사실 그냥 삶이 있었을 뿐이다.



14살 꿈에는 검은 형체가 쫓아왔다. 나는 그 형체만 봐도 온몸이 굳어졌다.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안간힘을 쓰며 도망을 갔다. 항상 같은 꿈. 교회첨탐까지 올라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면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간절히 사라지길 바라지만 언제나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느껴지는 고통은 깨어서도 느껴졌다.


나만의 울타리가 생기고 포근한 가족이 생기면 없어질 만도 한데 소중한 것이 생길수록 두려움은 다양한 형태로 불쑥불쑥 온몸을 긴장시켰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우연한 기회에 무의식을 다루는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만다라미술치료를 받은 1박 2일의 과정에서 꿈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도망가는 것에 치지기도 했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도 이제 알아버렸기에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휙~ 돌아서서 말했다.


'너 뭔데 이렇게 날 쫓아오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 형체는 천천히 나에게 왔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점차 형체가 나타나는 그것은 내 예상과 달리 금색망토를 한 귀여운 요정 같았다..


'나는 너를 지켜주려고 온 거야.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도망을 가는 거야'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눈물이 났다. 나의 두려움에도 바닥은 있었다. 끝도 없을 거라는 나의 생각이 모든 것을 막고 있었는지 모른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에 어둠이 덜 무섭게 되었다. 밤에 혼자 불을 끄고 누워 있을 수도 있고 암막커튼을 치고 잠도 잘 수 있게 되었다.





마스터는 보통 다이버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산호초와 물고기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려 하였지만, 나는 마냥 바닥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깊은 바다 바닥도 해수욕장 모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성부력을 유지하며 한참을 그렇게 바닥을 만져보았다.


바다 속에 끝이 있었어. 바닥은 있었어. 나의 두려움, 나의 힘듦에도 이렇게 바닥은 있어. 끝은 있어. 이제 끝에 온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바닥의 모래를 손으로 한 움큼 쥐어 보았다.


어드밴스 자격과정 중 수중촬영시간에.


수고했어.

지금껏 살아내느라, 살아오느라 수고했다...



*심해라는 용어는 이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깊은 바다로 바꾸어 쓰려고요.

*심해는 대략 2km 이상의 깊은 바다로, 사람이 수압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위키백과)

*심해 또는 해저는 수권에서 바다의 매우 깊은 구간으로,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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