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rtten by. 눌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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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했다.
5개월 후 이직을 했고,
다시 3개월 후,
퇴사했다.
새 직장에 들어간 지 몇 달만에 또다시 퇴사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던 나의 말을 반신반의했던 엄마는 내가 진짜 퇴사일을 맞고서야 "그래, 네가 다 생각이 있겠지..."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말미에 붙은 건 어쩐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인 듯했다. 결국 나를 울린 건 아빠였는데, 퇴사 이후 본가에 내려와 며칠을 쉬는 동안에도 그간의 일에 대해 한 마디 물음이 없던 아빠가 친구들과 놀러 가던 날 아침, 아무도 몰래 내 방 서랍장 위에 두고 간 용돈과 문자 메시지를 보며 '올해는 절대 퇴사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의지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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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두 번의 퇴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첫째로 입사하는 것보다 퇴사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것. 둘째로 그렇게 저지른 퇴사에 보편타당한 이유를 부여하는 것은 퇴사보다 더 어렵다는 것. 퇴사를 할 땐 퇴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는데, 막상 일을 놓고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이유가 불투명해진다. 관성처럼 출근하고 습관처럼 퇴사를 바라는 친구들을 보면 백수의 삶으로 영원히 도망치고 싶다가도 집에서 늘어진 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고 있자면 의심의 여지없이 퇴사라는 답을 내렸던 그 확신에도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들고 만다.
사실, 모든 선택이 그렇듯 퇴사에 보편타당한 이유가 어디 있겠냐만은 이직에 있어 '퇴사 사유'란은 비워두기에는 어딘가 께름칙한 것이었고, 그보다 앞서 만나는 사람들마다의 관심 어린 질문에 납득 가능하도록 답해야 했기에 언제나 나의 '퇴사 썰'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몇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꽤나 탄탄한 골조를 자랑했다. 입사를 하는 이유는 단순한데(=돈) 반해 퇴사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라 어느 한 가지를 꼽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이유는 나로부터 출발했고, 성장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면접 자리에서도 그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이었고,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나오는 얘기는 따로 있었으니, 그것이 4년 차 A&R 나의 진실된 '퇴사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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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가끔 시공간이 뒤틀리며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깨워주는 녀석이 하나쯤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녀석 때문(?)에 계속해서 회사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돈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는 꿈이나 목표 등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나에게 그 녀석은 애정이자 즐거움이었다. 동일한 연차의 다른 직종에 비하자면 통계적인 연봉이 높은 직업도, 그렇다고 안정성이나 업무 환경이 좋은 직업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저 일이 좋았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처음 일을 시작하던 때에는 언제나 동경하던 음악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부풀었다. 악보는 볼 줄 몰라도 들리는 멜로디들을 느낌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 즐거웠고, 작사는 못해도 아티스트의 이야기들을 한 편의 서사에서 이내 한 장의 앨범으로 엮어내는 작업은 천직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일이 싫어졌다. 출근하고 일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이 업 자체가 싫은 것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짙은 우울이 우러났다. 녹음실이나 촬영 현장 등 좋아했던 스케줄 현장도 가기 싫어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게 됐고, 하물며 사무실에서의 하루는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음악을 들어도 가슴이 동하지 않았고, 어떠한 피드백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연도 보고 싶지 않았고, 음악은 커녕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노이즈 캔슬링 기능만 켜진 텅 빈 이어폰을 몇 달째 끼고 살았다. 유일했던 애정이 사라지자 일할 이유를 잃었다. 일할 이유를 잃어버리자 그간 일해온 시간들이 무의미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의미를 잃고 나니 미래에 대한 의욕도 사라졌다. 일을 하며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계산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초라한 숫자들이 나를 비웃는 것도 잠시, 10년 후, 20년 후, 50년 후쯤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길을 잃었다'는 말을 실감했다.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것이었다.
어릴 때,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면 엄마는 행여나 손을 놓쳐 길을 잃거든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으라고 했다. 길을 모를 땐 더 이상의 엇갈림을 만들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길을 잃은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언제나 하나다. 일단 멈춤. 일단 멈춰 서서 돌아온 길을 곱씹다 보면 손을 놓친 순간이 언제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퇴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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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퇴사를 한 지도 이제 어느덧 두 달이 넘었다. 간간이 이직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짜' 퇴사 사유들을 읊는 스스로가 마음 편치 않은 순간들을 마주하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술잔 대신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태어나 처음 미아가 된 썰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 때 다시 이직을 결심했다. 일단 멈춰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그 속에 애정과 열정 가득했던 내가 살고 있었던 덕이다. '애정 빼면 시체'인 인간을 살린 건 역시 지난날의 다정(多情)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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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강주원 작가의 에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에게'에 나오는 글을 덧붙인다. 평소 같았다면 서점에서 선뜻 손대지 않았을 것만 같은 제목에도 눈길이 간 건 내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음을 들켜서였을까. 어쨌든 몇 편의 글만 보아도 이 작가 역시 꽤나 끝없이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었고, 수없이 퇴사한 경력이 있음에 어딘가 동질감을 느꼈다. 화려한 퇴사 경력만큼이나 책에도 퇴사에 대한 단상들이 많았는데, 그중 나의 마음을 가장 다독여줬던 글이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으면 모든 건 '불안의 영역'으로 남는다.
...(중략)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모든 걸 안개와도 같은 불안한 영역으로 놔둘 것인가. 아니면 그 안갯속으로 뛰어들어 당신이 상상하던 실체를 마주하고 불안을 해소하여 다른 감정을 마주할 것인가.
그건 온전히 당신의 선택이다.'
지금껏 퇴사하지 않고 회사 생활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퇴사하면 어떨까?'에 대한 안개는 이제 확실히 걷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