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집 옥상에 6 인 식탁 두 개 크기의 텃밭이 있다. 텃밭을 처음 보는 순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풀리면서 살포시 올라오는 흙 내음에 욕심(?)이 일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직전에 사신 분들이 정성 들여 10 년 동안 가꿔 놓은 텃밭이라 흙도 깊고 좋다고 했다. 텃밭을 가꾸어 보고 싶다며 남편을 쳐다보니, 남편은 자기는 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아예 시작할 생각을 말라고 했다.
그래도 화분 분갈이용으로 꽃삽은 하나 필요하겠다 싶어 꽃삽을 슬쩍 샀다. 그러고는 틈만 나면 남편을 붙들고 조잘대기 시작했다.
“저기 있잖아, 옥상에 텃밭도 있고 꽃삽도 있으니….”
남편은 웬만하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주었는데, 이상하게도 텃밭 가꾸는 일에는 완강했다. 끝까지 나를 외면하는 게 야속했지만, 의논 상대가 어디 당신밖에 없는 줄 아느냐 하는 마음이 일었다.
텃밭에 뭘 심을지, 주변에 고민을 나누니 카톡이 분주해졌다. 누구는 화단을 만들어라, 누구는 상추나 심고 말아라, 누구는 허브가 키우기 쉬우니 허브만 심어라 등 의견이 분분했다. 내가 텃밭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관절도 안 좋은 것을 고려하여 해준 조언들이었다.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머릿속에 입력했다.
‘우와, 그런 것들을 다 텃밭에서 키울 수 있구나!’
심을 만한 모종과 씨앗 리스트들을 좌르르 알아 놓은 건 좋은데, 이것들을 심기 전에 땅을 만들어야 한단다. 시어머니 가라사대, 퇴비를 흙의 1/10이 되도록 섞어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1/10. 이 비율을 지키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계획을 세웠다.
하나. 국그릇 크기만큼 흙을 바닥까지 몽땅 파내어 옆에 쌓는다.
둘. 그 흙을 다시 빈 공간에 조금씩 채운다.
셋. 흙을 넣을 때 퇴비를 최대한 정확하게 1/10 비율로 섞는다.
넷. 사진을 찍어 ‘짠 !’ 하고 자랑한다.
텃밭 앞에 서서 맨손으로 꽃삽을 쥐고 눈대중으로 작업량을 가늠해보았다.
‘뭐, 이쯤이면 나 혼자서도 두어 시간이면 되겠는데….’
패기 좋게 달려들었는데 막상 해보니 ‘꽃삽질’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더뎠다. 한 시간 가량 공을 들여도 작은 소포 상자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해도 뉘엿뉘엿 져갔다. 남편에게 나의 꽃삽질을 들키지 않도록 나만 알아챌 수 있는 작은 표시를 해놓고 조용히 후퇴했다.
그런 후 좀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내 힘이 달리는 것일 뿐 방법은 맞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같은 방식으로 해보자 심기일전하며 이번에는 목장갑도 챙기고 커피도 마셔가며 이틀에 걸쳐 두 시간씩 더 작업했다. 그렇게 해도 텃밭의 1/4 정도밖에 못했다. 이러다 진짜 ‘손목이 나가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포기할까 생각도 했는데, 한번 구상한 ‘그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혹시 나처럼 절박한 텃밭 초보자에게 도움을 주는 서비스는 없나 검색해봤으나, 나의 텃밭 규모와 해야 하는 작업이 너무도 소소하여 적당한 서비스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는데 갑자기 중고거래앱이 ‘띠링’ 울렸다.
오옷, 이런 텃밭 일에 대한 공고를 본 적은 없지만 아르바이트 구인을 올리는 사람들을 본 듯한데, 혹시?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공고를 올리고 기다렸다. 만세! 다음날 하겠다는 연락이 두 사람에게서 왔다.
제일 먼저 연락주신 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분이었다. 내 손목이 아프면 그 사람 손목도 아프겠다 싶어 그 분께 손목 보호 차원에서 안하시는 게 좋겠다는 설명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연락을 주신 남자 분으로 낙점했다.
[글 속 딴 소리] 이 이야기 2년 후에는 이런 가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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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말투로는 나이대가 좀 있는 것 같았는데 찾아온 이는 안경을 쓴 단정한 대학생 청년이었다. 옥상으로 안내하고 일의 범위를 보여주었다. 청년은 한 번도 흙 만지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먼저 무엇인가를 해 본 사람을 선배(先輩)라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나는 선배다. 꽃삽질을 먼저 해본 경험으로 나는 뻔뻔하게도 텃밭 선배가 되어 청년에게 꽃삽과 목장갑을 건네며 나의 강박적인 흙 준비법을 전수했다.
이제 텃밭에는 선무당이 둘이 되었다. 청년은 자기 생각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 정도 후에 가보니 청년은 “생각보다 힘드네요”라고 하며 땀을 닦았다. 청년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끈기가 없다고 하던데, 혹시 포기하고 도망가면 안 되는데 싶었다. 필요한 만큼 시간 들여서 쉬기도 하고 천천히 하라며 음료수와 간식을 챙기고, 내가 손목과 관절이 너무 안 좋아서 직접 못 한다며 최대한 불쌍한 ‘톤’으로 묻지도 않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청년은 다 하고 가겠노라 했고, 총 네 시간 반 만에 약속대로 나의 강박적인 흙 준비법에 따른 작업을 완수했다.
정갈하게 준비된 텃밭 사진을 가족 채팅 방에 올렸다.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동네의 ‘아름다운 청년’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청년’이 도와줬다고 했다는 말을 청년에게 전하자 청년은 돈 받고 한 건데 아름답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며 멋쩍어했다. 하지만 내 눈에 그는 정말 훈훈하고 아름다웠다. 여러 주나 묵은 나의 고민을 그렇게 단 반나절 만에 웃는 얼굴로 해결해 줬는데,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 후 육 개월 간 각종 모종과 씨앗들을 심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떠다 바치며 문안을 드렸더니, 심은 모든 것들이 나무가 되도록 자랐다. 씩씩하게 밭에서 걸어 나온 억센 상추가 그러했고, 잎은 동전만 했지만 비도 가려줄 만큼 높고 풍성해진 깻잎이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허브인 바질조차도 나무가 되어 힘차게 위로 쑥쑥 자랐다. 그 뿐인가, 초반에 오이인지 호박인지 수박인지 잘 알 수 없던 음흉한(?) 참외는 텃밭을 습격해 삽시간에 정글을 만들었다. 고추가 나 몰래 데려온 진딧물 가족은 한 부족을 이루도록 번성하여, 루꼴라와 고수 진영까지 장악해 외롭고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나에게 깊은 패배감을 맛보게 했다. 옥수수 얘기도 ‘스펙터클’한데, 나는 옥수수 대 하나에 옥수수가 여남은 개씩 주렁주렁 열리는 줄 알았다. 무지막지하게 큰 옥수수 대 하나에 옥수수가 달랑 하나 열리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그 외에도 비트, 토마토, 아욱, 치커리, 로즈마리, 민트, 겨자, 대파, 조선파, 부추까지 나와 내 텃밭은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 깊은 가을날이었다. 나무가 되도록 큰 나의 작물들 모두 일년초여서 정리를 해야 했다.
“내가 텃밭하지 말랬잖아!”
남편은 씩씩대며 옥수수 대를 부러뜨리고 깻잎 나무 둥치, 상추대 등을 뽑고 산처럼 쌓인 마른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간곡한 나의 부탁에 목질화 된 바질을 화분에 담아 실내로 데려왔다. 그 후 나의 겨울 텃밭은 조용해져서 12 월, 1 월, 2 월, 3 월이 평화롭게 지나갔다.
이듬해 4 월 어느 주말, 시장을 지나는데 모종을 팔고 있었다,
‘오옹? 모종을 판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상추만 두어 개 산다는 것이 상추 네 종류, 부추, 겨자, 치커리, 쑥갓 등 모종 열일곱 개를 샀다. 집에 와서 심으려 보니, 흙을 준비해야 했다.
주말이면 남편은 잠을 많이 잔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는데 손이 아파서 못하겠다며 일단 옥상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수도를 잡고 있는 남편에게 들으라는 건 아니라는 듯 적당한 크기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죽은 거 같아. 로즈마리는 겨우내 살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 옆에 민트도 뽑는 게 좋겠지? 잘라 봐서 속을 보라는데, 이것도 죽은 거 같네? 이거 하고 나서 흙 뒤집으면서 퇴비도 섞어야 하는데….”
남편 앞에서 꽃삽을 흙에 꽂은 채 꽤 깊이 박힌 로즈마리를 잡고 뽑겠다며 어설프게 낑낑대자, 남편이 나를 흘겨봤다.
“얍실이, 으이구. 이리 내놔!”
내 눈에 남편은 다소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년에 해봤기에 올해는 강박적으로 하지 말자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런데 흙을 뒤집고 퇴비를 섞던 남편이 혼잣말을 하는 것 아닌가.
“이거 꽃삽으로 할 일이 아닌데? 삽을 하나 사서 발을 딛고 해야 돼….”
아아, 남편이 능동적으로 더 잘 할 방법을 고민하다니….
‘아름다운 청년이다, 우리 남편도!’
[한국산문 2023. 2 vol. 20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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