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의 대학 도서관에서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책에 박고 한창 공부에 집중하는데,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상 아래로 에스닉풍의 긴 보라색 바지에 털 안감이 살짝 보이는 검은색 발목 부츠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발의 주인은 두툼한 패딩 코트를 입고 보라색 털실 모자까지 쓴 자그마한 동양인 할머니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혹시 차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내가 집에 갈 때 자기를 학교 밖 버스 정류장 앞에 내려줄 수 없겠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한여름에 한겨울 옷차림이라니 캠퍼스 주변에서 숱하게 마주치는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그녀의 등장에 뜨악한 기분이었지만, 철이 안 맞을 뿐 깔끔한 차림이었고 무엇보다 표정이 너무 간절하기에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후, 나는 자꾸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도 나를 계속 흘끔댔다. 아무래도 좀 이상한 사람인가 싶어 고민 끝에 학교 기숙사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정말 미안하지만, 다시 데려다 줄 테니 버스 정류장에 가는 동안 차에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천사 같은 동기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진정된 마음으로 다시 교과서와 씨름하는데,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나에게 왔다. 자기를 잊지 말고 꼭 데리고 가라고 신신당부하며,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다. 정말 믿어도 좋단다. 아차, 들켰구나! 내가 의심한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친구를 부르는 게 어쩐지 자기를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그녀에게 실례하는 같아 친구에게 다시 전화했다. 올 필요 없다고.
시간이 흐르고 도서관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왔다. 약속대로 나는 그녀에게 이제 집에 가자고 했다. 그녀는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둘러메고 커다란 서류 봉투까지 하나 끌어안고 따라 나왔다.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는 10분 남짓.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날따라 나무 난간마저 서늘하게 느껴졌다. 철컹, 무거운 문을 열고 나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녀는 쉰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퍼냈다. 자기 치아를 망가뜨린 치과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인데 변호사를 믿을 수 없어서 모든 법률을 직접 공부하고 있단다. 여자가 살기에 험한 세상이라며 아무도 믿지 말란다. 밤길이 정말 위험한데 그래도 우리는 둘이라 안전한 거라고, 함께 가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저는 밤길이 아니고 당신이 무서워요,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겠다던 친구를 그냥 와달라고 할걸. 후회했지만 그래도 체격은 나랑 비슷하니 만일의 경우에라도 밀리지는 않을 걸로 생각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실은 그 10분 동안 내가 그녀에게 미처 얘기 못했던 게 하나 있었다. 내가 2개월 차 초보 운전자였다는 것. 나는 불과 일주일 전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길을 벌벌 기어가다 잡혔고, 몇 주 전에는 한밤중 캠퍼스 내 역주행으로 걸렸던 전력이 있었다. 두 번 다 불쌍한 표정으로 임시면허증 종이 쪼가리를 내민 덕분에 계도만 받았던 운 좋은 초보 운전자였다. 그걸 알 리 없는 그녀는 나를 믿고 차에 올랐고, 그녀를 무서워하는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차를 탄 후에도 그녀는 계속 쉬지 않고 치과와의 분쟁 이야기, 믿을 수 없는 세상과 그렇지만 자기는 믿어도 좋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러모로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안전띠를 매고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가 잘 켜져 있는지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녀에게 어디로 어떻게 가느냐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버스 정류장이면 어디든 좋다며, 자기는 가는 길을 모른단다. 황당했지만 그녀에게서 벗어날 길은 하나, 약속대로 그녀를 적당한 곳에 내려주는 것뿐.
주택과 학교가 섞여 컴컴한 미로 같은 캠퍼스를 헤매는데 길은 모르지, 가로등은 왜 있나 싶게 어둡지, 옆에 사람은 계속 무섭지…. 어떻게 운전했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화단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경기 일으키듯 깜짝 놀라서 쭉 후진했다. 뭔가 덜컹했다. 다시 놀라 핸들을 오른편으로 꺾으며 전진하니 차가 인도 턱을 반쯤 걸쳐 올라가는 통에 차가 숫제 기울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두워서 그런다는 핑계를 대며 하이라이트를 켠다는 게 시동을 끄질 않나 와이퍼를 돌리지 않나,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내 정신은 달나라를 두 번도 넘게 다녀왔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래도 어찌어찌 간신히 차를 다시 제대로 된 밝은 길에 올려놓았다.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쥔 채 크게 숨을 내쉰 후, 한참 만에 옆을 봤다.
그녀는 뜻밖에도(?) 보조석 위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새파랗게 질려 두 배는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야 깨달았는데 그녀가 조용해진 지가 한참이었다. 순간 묘한 승리감과 함께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비로소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다시 가봅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얘기가 있다. 아시아인 남자가 캄캄한 시각에 장거리 버스를 탔는데 승객은 자기뿐이고 기사는 흑인이었단다. 인종에 대한 선입견으로 글쓴이는 흑인 운전사가 혹시라도 자기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서 공격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단다. 한껏 졸아든 마음으로 가고 있는데, 기사가 길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시 차를 세우겠다고 하더란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닌지 근심하며 창문을 살짝 여니 운전사의 통화 내용이 들렸다. 승객이 건장한 아시아 남자애 하나뿐인데 공격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자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려놓으려고 전화했다고.
그 순간 그 남자는 서로를 무서워했던 시간이 얼마나 무색했을까? 또는 자기가 무서워하는 상대에게 자신도 공포의 대상이라 안심했을까?
내려주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난 그녀도 지금 생각해보면 남에게 피해 안 주는 정도의 겁많은 괴짜 할머니 정도였지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미안해했어야 하나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나의 걱정이 꼭 부당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보니 세상은 실제로 험할 수 있고, 아흔아홉 번 무탈했더라도 한 번 당하면 후회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그 딱 한 번만으로 확률은 의미가 없어지니까.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할까?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차를 태워준다 약속하지 않을 테요, 약속했더라도 뻔뻔하게 취소할 것이며, 어쩌면 몰래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정말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멀쩡한 사람을 의심한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야 하는지 아직도 결론 내리지 못했지만, 가끔 궁금하다.
그녀는 나를,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한국산문 2023.11 vol 211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