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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영 Jul 21. 2024

아저씨 때문에? 아니, 덕분에!

After Breakfast...

   짧은 무계획 여행. 방콕 공항에 오후 시간에 도착해 이것저것 팜플렛을 주워들었는데, 수상시장 관광 상품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각색의 꽃, 싱싱한 과일들을 파는 수상시장 사진을 보며, 내 기분대로 혼자 택시나 툭툭을 타고 가겠노라 생각했다. 방에 짐을 후딱 풀어놓고 컨시어지 데스크 앞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니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다가왔다. 덩치가 매우 큰데 검은 양복을 입으니, 정말 믿음직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무엇을 도와줄까요?”

    수상시장을 혼자 가보려 한다고, 지금 가고 싶다고 하니 아저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지금은 이미 늦었단다. 아침에만 하는 시장이라 모두 닫았다고. 그러면 내일 아침에 가겠노라 하고 출발하면 좋을 대략의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신나게 커튼을 열어젖혔다. 바깥을 보니 날씨도 좋아, 기분 좋게 샤워를 한 후, 가뿐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지갑을 챙겼다. 전화 카드도 있어야 하고, 호텔 주소가 적힌 종이, 여권도. 그리고 잠깐, 카메라!

    대리석 바닥을 탁탁 소리가 나게 걷는 게 나는 지금도 재밌다. 계단이면 리듬도 탈 수 있어 더 신난다. 그래서 그날도 탁탁 타다닥. 어제의 그 키 큰 매니저 아저씨가 보였다. 서서 이야기하니 나는 목이 꺾이도록 올려다보게 되고, 아저씨는 나를 한참을 내려다봤다.     

    “어제 못 간 수상시장, 이제 가려고요. 택시타고 갈까 하는데, 어디로 가달라고 해야 하나요?”

    아저씨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침은 먹었나요?”

    “아…뇨(?)”

    갑자기 근엄해진 표정과 목소리로 아저씨가 나를 지긋이 눌렀다.

   “After breakfast.” (아침 식사 후에.)

   나는 아침을 안 먹어도 괜찮다며 수상시장 가달라는 말을 태국어로 적어달라고 했다. 다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After breakfast.”이번에는 설명을 덧붙였다. 호텔 조식이 잘 나온다며, 먹으란다. 나도 고집을 살짝 부렸다.

   “고맙지만 아침은 안 먹어도 되요. 그냥 시장 이름 좀 알려주세요.”

   아저씨는 한층 더 근엄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After breakfast.” 그러더니 아직 안 열었을 시간이란다. 그러니 아침 먹고 오라고, 그러면 알려주겠노라고.

   그런 거면 진작 알려주지, 괜한 실랑이를 안 했을 텐데, 속으로 궁시렁대며, 한편으로는 역시 현지인에게 물어보길 잘했지, 하마터면 허탕칠 뻔했잖아 생각했다.
    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갔는데, 아닌 게 아니라, 안 먹었으면 후회했겠다 싶었다. 죽도 맛있고, 카레도 맛있고, 과일도 한가득. 몇 접시를 비우며 알차게 아침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커피까지 마셨다. 45분쯤 지나 다시 로비로 나가니 아저씨가 다른 직원과 이야기 중이었다.

‘바쁘시구나’잠시 의자에 앉아서 뛰어나가고 싶어 하는 발을 통통 바닥을 차서 진정시켰다. 나의 지루한 표정을 읽어 봐주길 바라며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매니저 아저씨, 분명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내가 쏘아 댄 눈빛도 접수한 거 같은데, 말을 마치고도 오지 않는 게 아닌가. 저렇게 멀뚱하게 서 있을 거면서! 왜 안 오는 거예요!       

    성질 급한 나, 결국 타다다다 아저씨 쪽으로 걸어갔다. 아침 식사를 시키는 대로 잘 먹었으니, 어쩐지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저 아침식사했어요!”

     아저씨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리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위험해. 너 혼자 가게 할 수 없어. 못 보내. 안돼.”

    너무 기가 차면 사람이 말을 더듬게 된다. 어제는 오늘 아침에 가라더니, 아까는 아침식사 하면 알려준다더니 무슨… 내가 얼마나 태국을 혼자 여러 번 왔는지, 잘 다닐 수 있다고 더듬더듬 설명했다. 아저씨는 나를 달래는 어조로 왜 위험한지 설명했다. 수상시장이 골목골목 되어 있고 사람이 실종되기도 한다고.

    아니 저기요, 나는 그건 모르겠고요, 어제랑 오늘 아침에 당신이 이래저래 했잖냐 따지는 모드에 돌입했다.

     흥분해서 쏟아내는 내 말을 잠시 가만히 듣던 아저씨는 말해봐야 안 통할 거로 생각한 듯 이내 결의를 담아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러고는 자기 가슴팍 아래 높이에서 화르르 파다닥대는 내 머리 위로 멀뚱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그대로 장승이 되어 꿈쩍 안 하는 거다. 나를 봐주지도 응대해주지도 않는데 어쩌겠나, 포기할 수밖에. 허탈하고 괘씸하고 야속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고, 결국 그날 수상시장은 못 갔다. 뿐인가, 방콕 수상시장이 위험하다고 한 이야기가 귀에 맴돌아 아예 갈 용기를 잃어 그다음 날도, 그다음 여행에서도 못 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물정 모르게 생긴 작은 여자(애)가 어디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나 했을 아저씨가 이해된다. 그리고 포기하도록 그렇게 수를 써가며 애써준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나는 어쩌면 정말 그 아저씨 덕분에 안전하게 여행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콕 수상시장은 아직도 내 버킷리스트에서 잠자고 있고, 동남아 수상시장이 TV 화면에 나올 때마다 나는 여전히 조금은 억울하다.

아저씨 때문에 아직도 못 가봤다고요!


[시에 2024년 봄 vol 73 수록]    





세상이 무서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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