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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r 26. 2024

멋진 중년은 일이 없다.

멋있는 중년 여성이고 싶다. 멋있는 중년 여성들 사이들에서 살고 싶었다. 시대를 위해서 희생했던 지나간 아버지들처럼,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간을 꿋꿋이 이기면서 나아가는 이를 발견하고 싶다. 검색창에서 볼 수 있는 철 지난 40대 연예인 말고, 예쁨이 아닌 덕성과 지혜, 지성을 겸비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일이 없어 괴롭다. 일하는 척을 하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일들을 시간에 맞게 쪼개어서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직원과 대표가 출근하는 10시보다 1시간 더 먼저 간다. 9시와 10시 사이에 출근을 해도 되는 유연근무제를 적용한 터라 9시 5분 전에 도착해서 출근도장을 찍고, 1시간 정도 핸드폰으로 장을 본다거나 주식 시장을 검색해 보거나 아이들 학교에서 온 알리미를 들여다본다. 10명의 직원들이 오는 스케줄은 일정한 편인데 9시 10분쯤 나와 자리가 가장 먼 개발팀장이 오고, 9시 30분경 백엔드 개발자와 커머스팀 직원이 오고 나머지 직원이 10시 10분 전부터 속속들이 들어온다. 자리가 가까운 동료가 들어오면 핸드폰 화면을 잠깐 끈다거나 PC 화면을 쳐다보는 척하는 식으로 1시간을 때워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이지만 오늘의 나로선 내게 허락된 일들만 하는 방법을 일터에서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부끄러운 게 내겐 지옥이다. 


젊은 유명 작가가 아이를 키운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육아하는 아빠라니, 게다가 글도 잘 쓰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잘 닦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게 써 묶어 서점에 놓인 고운 물건, 책으로 만들어냈다. 나의 과거인 육아와 현재인 양육은 억지로 얼룩져 있는데 그가 아이와 보낸 시간은 보나 마나 아름다울 것 같다. 작가의 책은 전부 읽었는데 그 책만큼은 차마 읽을 수가 없다. 감히 내게 그토록 괴롭고 힘들었던 전부, 육아를 따뜻함으로 가득 채우다니! 북콘서트에서 얼굴 한번 봤던, 책으로 수없이 만났던 그 작가의 새 책 소식에 속이 쓰리고 입맛이 떨어지다 못해 살 맛도 떨어진다. 


"호박씨님, 사무실에 건전지 있나요?"

누군가는 내게 워킹맘이라고 일을 한다고 이름 붙여줄 터인데 오늘 하루 중에 일터에서 했던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하게 주어진 일은 사무실 문의 건전지를 교체하는 일이다. 내일 해도 될 법한 일들을 오늘로 당겨서 하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수에게 어떻게든 눈치를 보며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안감힘을 쓰는 그런 하루의 끝이었다. 4시가 다가오니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릴없이 PC 앞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쓸모없는 나를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런 4시가 다가오니 10분 전에 내게 미션이 주어졌다. 도어록 건전지가 다되어 소리가 나니 교체해 달라는 대표의 요청에 5분 안에 그 일을 해결하고는 뿌듯해한다. 

이게 오늘의 나다. 현재라는 자로 순간을 도려내어 내 앞에 거울로 놓아본다. 내게 주어진 일은 고작 이거다. 오전에 경력이음을 중재해 준 서울시 여성센터에서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냐고 문자가 왔었다. 10만 원을 준다는 데에 혹 한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나의 의미를 찾고 싶어 인터뷰를 하겠다고 답을 했다. 인터뷰를 집행하는 이는 유명 임팩트 회사의 연구원이었다.

 '일터에서 발휘하고 있는 역량'이 인터뷰 주제라는데에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고 있는 게 뭐란 말인가? 분명 나의 일터였던, 내게 주어졌던 가정 주부라는 직무에서 성공했었던가 묻고 싶다. 그 누구도 주부에게 상을 주지 않는 게 무슨 수로 성공을 잴 수 있는가 싶다. 

'일터에서 필요한 지원' 또한 인터뷰 내용이라는 문장에서 지원서를 제출했다. 내게 필요한 지원은 공감 어린 대화다. 그 누구도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는다. 주부였을 때도 나이 든 인턴인 지금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내게 주어진 일이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내게 허락하는 일의 범 위에 문제다. 겨우 주어진 기회로 경력이 이어지게 되니 용기가 나질 않는다. 자리를 꿰차고 않고 싶은 생각도 없다. 주변이들에게 거스름 없이 나란 존재를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에 일단은 자리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오늘이 전부가 아니라고 다독다독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외로움은 친구로 삼아보는 게다. 

지난 주말 마침 동생이 매장 정리를 시작하면서 그간 내가 옮겨다 둔 가게 인테리어 소품들 몇 가지를 옮겨다 주었다. 매장을 정리하며 혼자 동생이 슬퍼했겠구나 하고 짐작하기 전에 가게 콘셉트에 맞게 꾸며보려고 배낭에 짊어지고 광교행 지하철을 타고 갔던 재작년 겨울의 내가 떠올랐다. 그녀의 실패보다 나의 실패가 더 중요하다. 우아하고 멋진 40대의 언니가 아니기에 동생이 가져다준 소품들로 금세 무기력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세상이 내게 허락한 건 뭘까? 무엇을 하라고 태어난 걸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질문들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다. 


답을 해줄 타인을 찾고 있다. 위로를 줄 누군가가 그립다. 힘이 되어주고 싶은지 남편은 3년 후에 기획이나 마마케팅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즐겁게 일해보라한다. 그는 나란 여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지만, 소품들을 끌어안고 찢어지게 아픈 심정은 알지 못한다. 3년 전 친정집 부엌에서 동생과 '여왕의 오후'라는 이름을 지으며 오늘 같은 날이 올 지 알지 못했듯, 3년 후의 나는 무슨 글을 쓸지 알 수 없기에 아파도 아프다 하지 않아 본다. 참아보는 거다.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처럼 또래와 선배로 둘러싸여 지낸다면야 나는 이렇게 늙어가겠구나 또는 저렇게 퇴직하겠구나 하며 살아가겠지만, 나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시대를 풍미했기에 여전히 광고시장에서 유효한 이효리나 마흔을 가르치는 스타 강사 김미경이 아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사는 주재원 와이프들과도 나는 다르다. 여성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 내 앞을 걸어 나가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나와는 다를 것이다. 

 

사진: UnsplashMaliv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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