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본 건 아니었다. 남편에게 기록을 권한 건 나였고, 그래서 기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남편의 핸드폰을 여는 아내가 아니고 싶기에 그의 핸드폰에 음성녹음으로 남아있는 일기가 있겠거니 하고 말았다. 사이가 좋은 요새는 운전하는 그의 옆좌석에 앉길 즐긴다. 아이폰은 기능이 신박해서 음성을 받아 적는다. 그의 일기는 음성으로 녹음되고 문자로 남아있다. 아이폰 메모장은 첫 2 문장 정도를 보여준다. 그의 음성은 아니 남편의 일기는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날의 기록인가 보다. 남편은 내가 퍼부어댔다고 표현했다. 그랬었나 보다. 그럴만하니 그랬겠지. 퍼부었다는 표현에 섭섭함이 일렁인다. 부끄러움도 따라온다. 좀 더 우아하고 냉정하게 남편의 담배에 대처해서 그가 지금쯤은 아예 담배와는 상종도 안 하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결과 없는 바가지였다.
입사한 지 만 1년 하고 2달이 지나간다. 나의 흔적이 자꾸만 쌓인다. 3개월만 다니다 그만둬야지. 1년만 다니고 그만해야지. 이런 생각들로 매일 출근길에 나서도 퇴근길을 향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인 듯 마음먹자고 하는 날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사고가 난 날은 걸어서 퇴근하기 쉽지 않아 핸드폰을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울면서 남편에게 회사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고, 그렇게 잠이 들고 출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의 흔적들이 자꾸자꾸 쌓인다.
나의 입사 뒤로 입사한 이가 3명이다. 나까지 4명. 창립 멤버인 임원을 제하면 이제 절반이 새로운 사람들인 셈이다. 경영관리가 주 업무인지라 새로 들어오는 이들을 안착할 수 있게 돕는다. 인수인계받을 시간이 없거나, 인력이 늘 부족하니 혼자 이리저리 회사를 관리하는 플랫폼과 문서 같은 기록들을 살피다 보면 이전에 여기에 머무르다 간 이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 않다.
내가 떠나고 난 자리 또한 누군가가 메꿀 것이라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다. 영원한 건 단 하나도 없다는 세상의 진리를 난 너무나도 잘 안다. 함께 살 수 있을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찬 몇 년 전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관계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상처가 깨끗이 지워질 수는 없지만 삶은 변화 그 자체라는 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알고 있기에 회사를 마주하는 나의 마음가짐 또한 경력단절되기 전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오늘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잘 알 고 있다. 잊지 않고 매일 상기한다. 오늘 하는 이 일이 하찮더라도 괜찮을 수 있다. 영원하지 않고 정말 잠깐이기 때문이다. 사무실 왼쪽 바깥쪽 두 번째 책상에서 경영관리와 광고사업을 맡아서 정신없이 일하는 오늘은 길고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찰나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회사는 매일이 다르고, 매주가 다르다. 입사할 당시 1년 전만 생각해 보아도 회사는 딴판이다. 나 또한 그리고 회사의 분위기 또한 딴판이다. 지금 함께 일하는 이들 또한 나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업 앞에서 누군가에게 인수인계한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의 아이라 생각하고 대하라는 어이없지만 단순 명쾌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내 남편이 아니고 옆집 아저씨라고 생각하면 남편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듯이 말이다. 남편 또한 그저 젊은이이고, 이젠 중년을 넘어가고 있으며 결혼은 처음 했고 가장이란 무게도 머리털 나고 처음 짊어졌을 뿐이라 처음 보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대견하고 기특하기 그지없다.
내게 주어진 일들은 사실 내 다음에 올 그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그 누군가는 사무실 왼쪽 바깥쪽 두 번째 책상에 앉아 내가 남긴 흔적을 더듬을 것이다. 일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면 내게 감사해할 것이며, 내가 남긴 실수를 발견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기쁠 것이다. 그래. 이런 마음으로.... 저 미래의 시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후임을 위해서 오늘의 일 앞에 서보는 거다. 그래그래. 이런 마음으로 내일은 출근길을 나서야겠다.
사진: Unsplash의Hai Nguy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