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슐디궁.
'슐'에 강세만 넣는다면 한국사람으로썬 독일 사람과 거의 일치하게 발음할 수 있는 단어다. 한국어 속에서 정확하게 같은 말을 찾아본다. 쉽지 않다. "excuse me"를 검색창 사전에 입력하면 나오는 단어다."Entschuldigung" 대신 "excuse me"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를 살펴보면 한국어로의 호환이 더 쉬우려나 싶다. 가벼운 사과, 죽을 죄는 아니고 만회가 가능한 건에 대한 양해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대에게 심각하지는 않은 불편을 끼치게 될 점인 걸 제가 알고 있어요.' 이런 마음을 나타내고 싶을 때 쓴다.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거하게 차려진 정상스런 한식 밥상 같은 말이 아니다. 저녁을 먹고 3시간이 지난 늦은 밤 아이들이 출출하면 방에서 나온다. 눈치를 보고 쉽게 제안하는 떡라면 같은 말이다. 한 줌의 파와 떡이면 그럴싸해지는 전천후의 떡라면 야식 같은 단어가 '엔슐디궁'이다.
악착같이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이 상대방에게 열받는 때가 있다. 내가 배려해줬으니, 내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해줬으니 부디 너도 나를 배려해달라고 바란다. 그 바램이 통한다는 건 귀하디 귀한 경험이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바라며, 실망하고, 화를 낸다. 다시는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글로 경고를 한다. 나 많이 화났다고 티를 내되 억양과 어조가 묻어나지 않는 문장을 건낸다.
임신한 어린 사수가 회식에 참석하려고 간만에 사무실 근무를 하러 나왔다. 그녀의 재택 근무 덕분에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그녀가 간만에 나왔으니 그녀 특유의 꼼꼼함이 나를 숨막히게 한다. 회사의 대표 계정으로 메일을 쓰고 그 메일을 읽어보면서 일일이 평을 한다.
"그런 내용은 이야기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나라면 쓰지 않았을 문장을 당신도 쓰지 말아주세요. 이게 그녀의 일관된 태도다. 할 수 있는데까진 해보지만 내키지 않을 땐 성격대로 날린다. 사수가 대표메일을 안보는 재택근무 시간엔 더더군다나 하고 싶은 내용을 섞어서 메일을 쓴다. 그보다 속 시원한 일이 내게 또 있겠는가? 잽싸게 '알겠습니다.'로 답해서 그녀의 말을 끊고 또 다짐한다. 이 짜릿함을 놓칠 수 없으니 난 또 할 말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난 나니까.
죄송하다고 하기 싫고 죄송할 것 까지도 없을 땐 '엔슐디궁'을 꺼내본다. "알겠습니다."가 이 땐 엔슐디궁이다. 죄송하단 말은 적절하지 않다. 마음에도 없는 죄송하다는 어색하기까지 하다.
너의 말을 알아는 듣겠는고, 너가 불편함을 느낀 줄은 나도 안다. 요 정도가 ' 알겠습니다'가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양해를 구합니다' 라는 말을 써야할 때, 나는 사수에게 '알겠습니다'로 응한다.
사수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예정인지 잘 알고 있다. 지난 1년동안 나와 가장 대화량이 많았던 사람이 그녀다. 지난 1년 동안 나와 한 공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 또한 그녀다. 그녀를 이해하지만, 업무를 정확하게 그녀처럼 해내라는 요구에 난 포기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그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튕겨 나가거나 일 자체를 그만뒀을 것이다. 오늘의 호박씨는 적당히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건내고 그냥 일한다. 내 스타일로 일한다."알겠습니다","엔슐디궁"을 던져주고 살아온 대로 산다. 어쩌라고.... 이게 난데..... 그렇게 그녀의 스타일대로 일을 해서 여적 회사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를 읖조리면서 말이다.
인간은 인간들사이에 있을 때 인간이다.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때 사람이라 부른다. 이 도시에선 원하지 않는 군상들로 둘러 쌓여 살고 있는 중인다. 왜 나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왜 나처럼 말하지 않는가, 어찌해서 내가 배려하는 만큼 배려하지 않는라는 무거움으로 오늘을 대한다면 이 도시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니 적당히 미안해하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어물쩍 양해를 구하는 엔슐디궁으로 살아가야한다.
독일에서 가장 강력하게 느꼈던 점이였다. 분명 잘못했고, 죽을 죄를 지었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하지 않는가가 궁금했다. 그들은 사과가 아닌 그 다음 스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죄는 없었다. 일정이 생각보다 늦어지게 됬어.
네가 주문한 물건은 내가 말한 예상일보다 일주일 늦게 나올꺼야.
내가 너에게 제공하기로 한 서비스는 한 달 후에 줄 예정이야.
그들은 죽을 죄를 지었다거나 죄송하다거나 정말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어쨌건 나는 너에게 그 서비스를 줄 것이라고, 그 물건을 전달할 것이라고, 그러니 엔슐디궁.
참으로 담백하고 건조한 단어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단어다. 어찌됬건 나는 내 스타일대로 살아가며, 이게 내가 불편해지지 않는 한에서 너에게 줄 수 있는 전부라고 그들은 내게 말했다. 살아보겠다고 정을 붙여보겠다고 애정을 들여 나를 해체해가면서 살아야 된다고 배웠던 한국에서의 교훈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그 적당함을 경험하고 알아차린데는 뜻이 있을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그 커다란 인생이라는 존재가 내게 알리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적당함. 적당히 미안하고 적당히 어물쩡 넘어가며 선과 악, 흑과 백엔 늘 중간지점이 있다는 걸 알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사진: Unsplash의Dynamic 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