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 스승
운전을 하는데 옛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내 스승님! 15년 전, 나를 갈고닦아주셨던 교직 선배님, 퇴직 후에 시인으로서 인생 2막을 살고 계신, 나의 롤모델. 유일하게 나를 가슴으로 혼내주셨던 큰 어른!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너무 많지만, 번지르르한 것을 딱 싫어하시는 매화 같은 분이라서, 설명은 여기까지.
운전 중에는 절대 통화하지 않는 철칙으로 받지 못했다. 원래도 운전 중 딴짓을 하지 않지만, 십 년 전부터 귀가 아파 균형감각이 둔해진 뒤로는 절대 집중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휴대전화를 보니 '전화를 달라'라고 문자를 남기셨다. 뭔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먼저 연락 안 하시는 성격을 알기에 반가움보다 염려가 일었다. 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안 받으신다. 마음이 덜컥했지만 요즘 내 예민함으로 기인한 감정인 것을 알기에 한 템포를 쉬었다. 그리고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한 시간 뒤 전화를 드리겠다는 답문을 했다. 엇갈리지 않게.
한 시간 뒤.
아주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다. 가벼운 일상에 대한 안부를 묻고, 선생님 댁 갑작스러운 리모델링 사건도 듣고, 반공 연설 다니셨던 어린 시절 일화도 잠시 스쳤다. 그러다 본론으로 아버지 책을 언급하셨다. 2월 49제 이후에 나의 스승님께는 울 아부지 책을 한 권 가져다 드렸었다. 아버지 생전에 우연히 대통밥 집에서 만나셨었기에, 두 분은 구면이었다. 막걸리 집에 가서 울며 하소연하던, 내 주사를 통해서도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를 알고 계셨고. 서로 생면부지였지만, 성함을 알고 반갑게, 아주 반갑게, 마치 고향 선후배처럼 반가워서 악수를 하셨더랬다. 학교 아버지와 집 아버지의 만남! 당연히 울 아버지 마지막 육개장도 아주 맛나게 잡수고 가셨었다. 그러니 울 아부지 책은 당연히 드려야 했다.
맑은 시냇물과 청정한 우물의 만남 같았다. 두 분의 조우는. 내 눈에는 그랬다. 서로 다른 맑음과 깨끗함이 만나는 것처럼! 보는 내가 행복했었다.
"내가 새벽에
너희 아버지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눈물을 떨구었는지...
이렇게 한생을 오롯하게
모든 것을 다 받쳐서 생명을 지켜가며 사셨다니.
내가 알던 것은 그 수많은 곡절 중에 일부도, 아니 티끌만도 아니었더라. 그 큰 숲에 일부도 아니더라.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스승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여.
너희 아버지가 이 나이의 나를 눈물짓게 하는
큰 스승이셨다. 오늘 한나절 내내.
.
.
."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 이런 이유였구나. 미흡한 글재로 억척스럽게. 49제 안에 회고록을 썼던 것이. 이보다 더한 위로가 없었다. 울 아부지의 한평생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대로 흡수해서 품어 줄 수 있다니. 이 이상의 찬탄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말끝마다 감사합니다를 읊조렸다.
최고의 위로였다. 묘지명을 써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다던 거친 욕심이 완벽하게 채워졌다. 많이도 필요 없었다. 아버지를 닮은, 이 어르신이 이렇게 해주시는 이 말씀이, 진짜 묘지명이었다. 그 뒤로도 10분이 넘게, 나는 돌아가신 울 아부지를 향한 아름다운 찬사를 들었다. 행복했고, 안타까웠고, 위안을 얻었으며, 위로를 받았다. 시인 선생님은 말씀도 별처럼 빛나고 노을처럼 따스했다. 마치 울 아부지처럼. 그 뒤로도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아름다워서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본다.
"~이런 것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야, 마음이 그냥 쏟아지는 것이지... 마구... "
"~이런 마음은 풀 한 포기도 귀하게 여기는 시인의 마음이거나, 모든 생명을 귀애하는 스님의 마음인 것이지..."
"~불교의 담론이 바뀌면서, 옛날의 거사들이 숱하게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지. 그 큰 분들이~"
"이제 슬픔을 맑게 다스려야지. 그게 길어지면 남들은 청승이라 한다~~ 여유가 되면 술 한잔 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더 하자~"
아버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더 있다니. 상상을 못 했다. 우리 가족들도 조심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선생님과 할 수 있다니! 최고의 선물이다. 맘껏 그리워하고 기릴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열어주신다니 더할 나위가 없다.
아빠! 들었지?
아빠의 그 가냘프고 곧았던 인생을, 오롯하게 이해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 가족도 아닌데! 조금은 더 행복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