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토론토와 브루노 실라노
1월 14일 오후, 공동연구단을 태운 에어캐나다 A321 비행기는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착륙했다. 하늘에서 내려 본 토론토 시내는 온통 은빛 세계였다. 원래 항공기에 관심이 많은 최용석은 비행이 즐겁다. 사실 조종사가 됐으면 하는 후회를 하는 적도 많았다. 그리고 출장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오늘은 어떤 기종을 탈까 하는 그런 궁금증도 생겼다.
사실 세계적으로 민항기를 만드는 회사는 딱 두 곳뿐이다. 미국의 보잉과 유럽의 에어버스. 미국에는 과거에는 맥도널 더글러스, 제너럴 다이나믹스, 노스롭과 같은 여러 항공사들이 있었고 다양한 군용기를 만들었다. 민간 항공기는 보잉과 맥도널 더글러스가 경쟁했는데, 어느 순간 보잉이 모두를 잡아먹었다. 나중에 록히드 마틴이 새로 생겼지만, 보잉과 민간 상업용 항공기에서는 경쟁이 안 된다. 유럽이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에어버스와 미국의 보잉 양자 구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두 비행기 제작사 중 한 곳이 만든 비행기를 탄다는 말이 된다.
최용석은 보잉보다는 에어버스 기종이 더 좋았다. 막상 타고 보면 뭔가 좀 안락하다고나 할까. 어차피 비즈니스가 아닌 이코노미 좌석을 타는 데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보잉은 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것에 비해 에어버스는 좀 부드럽다는 뭐 그런 느낌. 이 느낌은 비행기의 외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좀 그렇다. 특히 날개에서 그런 차이를 크게 느낀다. 미국과 유럽의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착륙 때 항상 나오는 그런 종류의 방송이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지금 토론토의 피어슨 공항으로 접근 중입니다. 현재 토론토의 날씨는 쾌청하며 기온은 수은주 기준으로 영하 25도, 체감온도로는 영하 35도입니다. 안전하게 착륙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려 주십시오.”
믿을 수가 없었다. 영하 25도도 낯선 숫자였지만 35도라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캐나다 동부가 춥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였다. 뭐 별로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워싱턴의 기온은 서울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여기는 완전 별천지다. 물론 한국에도 강원도 높은 산지에서는 그런 기온을 보이기는 해도 도시에서는 경험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캐나다 입국 절차를 다 마치고 일행들이 짐을 찾느라 분주하던 시간, 먼저 가방을 챙긴 최용석은 흡연실을 찾았다. 피어슨 공항 입국장 내부에는 흡연실이 없었다. 입국장을 빠져나가 밖으로 가면 되는데 굳이 실내에 흡연실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담배도 한 개비 피울 기분으로 공항 밖으로 잠깐 빠져나왔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국제공항답게 많은 차량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따로 흡연 장소가 보이지 않기에 휴지통 근처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몇 모금 담배를 피웠을까, 뭔가 머리 쪽이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담배를 들고 있던 손도 시렸다. 비행기 기장의 안내 방송이 생각났다. 체감온도가 영하 35도. 춥구나. 얼른 담배를 마무리하고 다시 공항으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이 그리 큰 방한복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꽤 춥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그날 저녁에 경험할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예고편이었다.
일행은 역시 예약했던 현지 여행사가 보낸 미니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오전 시간에 토론토에 도착은 했지만, 공식 일정은 다음날부터라서 이날 하루는 완전히 휴식일이었다. 현지 가이드와 여행사는 미리 오후 일정을 촘촘히 준비했다. 점심 후 시내 한복판의 그 유명한 캐나다 내셔널타워에 올라갔다가, 온타리오 박물관을 들렀다가 온타리오 호수 주변을 둘러본다는 일정이었다. 봄이나 가을에 토론토를 왔다면 갈 곳이 더 많았을 텐데 엄동설한에는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놓인 광활한 온타리오호 주변을 걷는 것도 좋지만 한겨울에는 별로 추천하지 않는 일정이었다.
호텔 주변의 한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원래 토론토의 한인타운은 시내에서 약간 북쪽에 있고 그 주변에 한식당이 많았지만, 호텔은 시내 남쪽에 있었는데 신기하게 한식당 한 곳이 호텔에서 걷는 거리에 있었다. 이때에는 한인타운을 가보지 못했고 나중에 언론사 기자를 안내해 취재를 위한 출장에 와서야 최용석은 토론토의 한인타운을 가봤다. 한인 교포가 1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기에 2백 만이 넘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 본 최용석에게 토론토의 한인타운은 아주 아담해 보였다.
토론토 일정은 토론토 하이드로라는 시영 전력회사의 노조위원장 브루노 실라노의 도움을 받아서 짰다. 캐나다에는 전력을 포함한 캐나다공공노조가 있는데, 이름이 약자로 CUPE, 즉 Canadian Union of Public Employees이었다. 캐나다의 주 가운데 온타리오주는 캐나다의 심장이라고 표현됐다. 그만큼 캐나다의 산업 중심이었고 가장 큰 도시 토론토도 온타리오주에 있다. 캐나다 연방정부가 영국과 미국을 따라 전력산업 자유화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앞장선 곳 역시 온타리오였다.
온타리오 하이드로라는 주 전체를 독점하던 전력회사를 영국식 교과서대로 발전과 송전, 그리고 배전으로 나눠 쪼갰는데, 토론토 하이드로는 온타리오 하이드로에서 분리된 배전회사였다. 캐나다 전력회사에 하이드로라는 말이 주로 붙는데 이는 캐나다가 수력자원이 풍부해 수력발전소가 많아서 관행적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전기요금 청구서를 하이드로 빌이라고 하는데, 잘못 들으면 수도요금 고지서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브루노는 최용석이 국제노동기구 ILO 회의에서 만났던 CUPE 사람에게서 소개를 받고 연락이 된 친구였다.
이메일로 몇 차례 공동연구단 이야기를 했고, 토론토를 방문하겠다 하니 브루로는 대환영이었다. 일정을 짤 때 정부 측에서는 캐나다를 피하려 했지만, 노조 측에서 강력히 주장해서 토론토 일정을 넣었는데, 사실 최용석으로서도 토론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노동조합의 국제연대, 즉 솔리데러티를 믿었다.
브루노는 이날 오후에 꼭 자기를 먼저 만나달라고 했었고, 최용석은 김종호 국장과 함께 브루노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했다. 연구단 일행이 토론토 관광에 나설 시간대가 비어있었기에 그게 가능했다. 호텔로 브루노가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세 사람은 호텔을 떠나 토론토 시내로 나왔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북쪽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털모자는 기본이고 두꺼운 외투에 장갑을 낀 모습으로 총총히 걷고 있었다. 날씨는 매서웠다. 온타리오호에서 불어오는 북풍은 이게 혹시 우리가 상상하는 만주의 추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사실 김 국장과 최용석은 이런 추위를 예상 못 하고 서울에서의 복장과 비슷했다.
어느 순간 가방을 들고 있던 손이 너무 아팠다. 장갑도 끼지 않고 가방을 들었으니. 최용석은 오른손에 들었던 가방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은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후 다시 왼손의 가방을 오른손으로 옮기고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이런 동작이 몇 번 되풀이되자 같이 걷던 브루노를 대신해 일행을 안내하던 친구가 물었다.
“어, 장갑을 안 꼈네? 흐흐, 내가 가방 대신 들어줄까?”
최용석은 두 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 고마워.”
짧은 대답과 함께 가방을 그 친구에게 던지다시피 넘겨줬다.
브라이언으로 나중에 알게 된 그 친구, 이런 날씨 예상 못 했냐 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받았다. 옆에서 걷고 있던 김 국장도,
“야,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맵냐? 추워 죽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털모자 하고 장갑 챙길걸.”
라며 투덜거렸다.
“사실 이 정도일 줄 몰랐지요. 워싱턴은 서울과 비슷했는데, 여긴 확실히 춥네요. 캐나다 사람들이 왜 아이스하키 잘 타는지 알겠어요. 하하.”
최용석의 대답에 김 국장은
“갑자기 브라질이 그립다. 거긴 여름이었는데 말이야. 난 체질적으로 추운 걸 못 참아.”
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김종호 국장은 깡마른 체형으로 추위를 잘 견딜 모습 자체가 아니었다. 최용석은 속으로 나도 이렇게 추운데 이분은 어떨까 하는 걱정을 잠시 했다.
칼바람을 뚫고 20여 분 걸어서 드디어 브루노가 기다리고 있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평범해 보이는 회색 건물 3층에 올라가자 짙은 갈색 나무문이 나왔고, 브라이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간 뒤 최용석 일행을 안내했다.
아담한 사무실이었다. 근무 인원은 세 명 정도로 보이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중년 사내가 일행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구레나룻이 인상적이고 얼굴 전체가 면도를 하루라도 안 하면 털보가 될 것 같이 수염이 많아 보이는 둥글면서 길쭉한 사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브루노 실라노입니다.”
“아, 예, 저는 연락드린 한국의 전력노조 최용석입니다. 여기 같이 온 사람은 김종호 국장으로 노조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분입니다.”
일행은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눴다.
“멀리서 오느라 힘들지요? 여긴 어제부터 눈이 왔고 지금 보다시피 시내 전체가 하얗게 덮였어요. 서울은 날씨가 어떤가요?”
브루노는 일행을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로 안내하며 말을 이어갔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미국 동부와 날씨가 비슷해요. 여름에는 덥고 겨울은 춥고. 그런데 토론토는 서울보다 훨씬 추운 것 같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단단히 준비하고 올 걸 그랬네요.”
김종호 국장이 대답했다.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던 드롭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따르며 브루노는,
“아마 호수 때문에 그럴 겁니다. 보셨지요? 온타리아호. 북미대륙의 다섯 개 호수 중에 대표적인 호수입니다. 바다 같아요. 호수 건너편에는 미국이고. 보이지는 않지만요.”
라고 답했다.
일행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김종호와 최용석은 현재 한국의 상황을 설명했고, 브루노는 캐나다의 구조개편 이야기를 설명했다.
“최 부장님, 내일 미팅은 여기 말고 다른 좀 큰 사무실에서 할 겁니다. 여기는 CUPE의 토론토 지부라고 로컬 1이라고 부르는 곳이고 좀 작아요. 10명이 넘는 일행을 맞이하려면 토론토 하이드로 회사 안에 있는 회의실을 사용해야 합니다. 회사에는 협조를 구해 놨습니다.”
브루노의 말이었다.
“그럼 회사 쪽에서도 누가 나오나요? 내일 면담에?”
“아니요. 일단 저와 우리 지역 시민단체 사람들이 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한 분이 더 오는데요, 토론토 대학에서 은퇴한 교수님인데, 저랑 개인적으로 친합니다. 한국의 연구단 방문 이야기를 하니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브루노의 대답에 최용석이 질문했다.
“그래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오네요. 뭐 좋지요. 일단 연구단장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일행은 이후 두 시간 동안 전력산업 자유화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노조의 전임자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지 불과 1년이지만 최용석은 국제활동의 경험을 꽤 많이 했다.
전력노조가 가맹한 국제공공노련이라는 공무원을 포함한 세계 공공부문 노조의 경험이 제일 컸다. PSI라고 불리는 국제공공노련은 20세기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공무원들이 모여서 출범한 조직이었고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와 같은 생활권인 프랑스 페르니 볼테르라는 도시에 있었다.
다음으로 역시 전력노조가 가입한 국제에너지화학광산노련이라는 조직으로 본부는 런던에 있었는데, 이 조직은 전력이라는 업종 관련으로 전력노조가 한국을 대표해서 회원조직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국제노동단체의 회의에 몇 번 참석하면서 노조운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최용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떴다. 조금씩 노조가 뭔지, 노동운동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자 사이 연대의 정신이었다. 이번 연구단의 해외조사도 그런 연대의 정신이 발현된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돕고 있었다. 단 하나의 같은 이유로. 노동자의 권익 보호. 브루노와의 대화에서 이 연대의 정신을 다시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