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남자

by 정서진

오랜만에 아침 산책길을 나섰습니다. 요 며칠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햇살이 창문을 톡톡 두드립니다. 보랏빛 라벤더, 노란 튤립이 싱그럽게 피어 있는 어느 집 정원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워싱턴 호수가 보이는 길 가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맑고 투명한 하늘, 상쾌한 아침 공기 그리고 그 하늘을 닮아 반짝이는 호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때마다 공연이 있을 때 전 늘 설레는 마음으로 객석에 앉아 그들의 연기를, 그들의 땀방울을 봅니다. 그런데 공연 내내 긴장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무대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실수할까 봐, 연기를 못할까 봐 걱정이 돼서가 아니고 얼마나 노력하고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스스로 실망할까 봐 생각만큼 좋은 연기 못했다고 좌절하고 마음 아파할까 봐 늘 기도하는 심정이 됩니다. 그렇게 한 편의 연극이, 뮤지컬이 끝나고 저는 객석에서 일어나 마지막까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잘했다고, 그동안 너무 애썼다고. 사람들이 하나 둘 공연장을 떠나고 나서도 전 끝까지 객석에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공연이 끝나고 텅 빈 객석을 보며 무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 아이에게 다가간 적이 있습니다. 조심스레 어깨를 다독여주자, 저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더군요. 어떤 마음일까. 몇 달을 고생하며 준비한 공연이 끝나고 박수 소리도 멈추고 어두컴컴한 객석을 바라보는 저 아이의 심정은.


지금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울고 있을까 봐 죽을 만큼 힘들게 노력했는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서 허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까 봐 마음이 아픕니다.




유난히 길었던 봄날 대학로 거리를 헤매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데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건 무얼까, 긴긴 세월을 함께 보내고 나면 저런 마음이 될까. 창가에 기대 어스름 땅거미가 지는 낯선 도시를 보면서 가슴이 시렸던 그 시간이 떠오릅니다. 이십 대라 불렸던 시절, 치기 어리고 당찼지만 실패도 많았던 그래서 절망 한가운데서 몸부림쳤던 날들.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마주해야 했던 잔인한 날들. 누군가는 청춘이라 부르는 그 시간 함께 했던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그리움으로 당신의 아픔을 바라봅니다.

벽에 쓰인 글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먹먹하게 서 있던 남자는 젊은 시절 대학로 어디쯤에 서 있던 저와 닮았습니다. 사랑도 공부도 인생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사는 건 원래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내 마음은 이렇게 황폐한 데 아무도 곁에 없고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시 힘내서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온 힘을 다해 이 길고 긴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먼 곳 시애틀까지.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그 남자에게 또 다른 내가 다가갑니다.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지금 최선을 다한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당신에게 전 아주 먼 곳에서 말합니다.


김연수 작가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 삶을 마음껏 누리는 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고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당신과 나,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당신이 맞이하게 되는 이 시간들 이 삶을 맘껏 누리세요. 그게 당신의 의무이고 권리니까요.


비 오는 시애틀의 봄날. 막 연두색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나무 위에, 풀잎 사이에, 지붕 위에 토도독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면 눈부신 햇살이 호수에 비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전 보고 말았어요. 저 멀리 호숫가에 걸쳐 있던 투명하게 맑은 무지개를. 이런 거구나. 그래서 희뿌연 안개로 가득한 아침도, 어둑한 그림자가 저 혼자 길어지는 저녁도 견딜 수 있는 거구나. 그날 산책길에서 본 무지개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당신의 시간들에 앞으로 펼쳐질 눈부신 날들에 그렇게 이쁜 무지개가 놓일 거예요.


오늘, 그 기적 같은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아파하고 다시 힘을 내세요.


오래도록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당신을 응원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바다 건너 멀리서. 서진이가 서진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