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발끝까지 와버린 오늘은 시애틀을 '비와 안개'가 아닌 '봄과 벚꽃'으로 명명하게 합니다.
유덥의 쿼드 광장, 이 맘 때가 가장 예쁘다는 그곳. 아름다운 건물들이 에메랄드빛 지붕을 이고 있는 그곳에 서서 활짝 핀 벚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중세의 신비한 고성에 와 있는 듯했어요. 부드러우면서 차갑고 지적인 석조 건물은 오래전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나무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따스한 봄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벚꽃 송이 사이사이로 빛나던 햇살은 어느새 건물의 창가에, 지붕에 내려앉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원하고 달콤한 바람이 불어오면 벚꽃 이파리들이 한꺼번에 후드득 날립니다. 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아름다운 모습. 일 년에 딱 한번, 이 계절, 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이 황홀한 꽃들의 축제. 쓸쓸한 표정으로 벚꽃길을 걷다가 하늘 보고 살짝 미소 짓는 당신이 저 앞에 있습니다.
토론 모임 전에 잠깐 시간이 나서 헨리 아트 갤러리에 갔습니다. 이 갤러리는 겉모양은 비행기 격납고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면 유럽의 어느 성당에 들어온 듯 천장까지 섬세한 조각들로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전시실 밖 문을 열고 나가니 벤치가 놓여 있는 중정이 나옵니다. 아늑한 공간의 천장은 원형 유리여서 햇살이 동그랗게 쏟아집니다. 한참을 그 신기한 공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이 평온한 시간. 이렇게 천천히 갤러리를 거닐며 작가들의 영혼을 담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참 여유로워집니다.
시애틀에 온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에 갑니다. 어떤 날은 그림이 말을 걸어오고, 또 어떤 날은 조각들이 손짓을 합니다. 켜켜이 묵은 시간들이 다시 살아나 공간을 채우고 저는 완벽하게 혼자가 됩니다. 여전히 과묵하게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가끔 뒤돌아서서 다음에 또 만나러 오겠다는 실없는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벽에 걸린 그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생각합니다. 가끔은 무조건 날 이해해주고, 이런 순간 내 곁에 서서 같은 그림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문을 걸고 단단히 마음을 단속하고 모로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고 아물기를 바라며 훗날 희미한 흉터로만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나조차 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날 무조건 이해해 주길 원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 무슨 철딱서니 없는 이기심인가 싶다가도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바람들은 쓸쓸한 벚꽃 엔딩이 되어 흩어지고 전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전시실 한 켠의 의자에 앉아 지금 내 곁에 없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오후에 호숫가로 난 길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헨리 갤러리의 그 천장처럼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아찔했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자유로운 시간 속에 있어도 되는 건가. 따스한 봄 햇살을 다 품고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그런데 그다음 순간 말간 눈물이 점점이 흩어집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시간에 당신은 얼마나 힘들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죽을 만큼 노력하는데 좋지 않은 결과에 실망해 축 처진 어깨로 간신히 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동료들에게 아픈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은 슬픔이 되어 밀려왔습니다.
‘인생은 때로 의지 밖 일 투성이’라면서요. 인생이 이렇다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아니라 매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도 내 뜻대로 안 되는 일 투성이거든요. 자책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지금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 잘 아실 거라 믿어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이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곳 시애틀의 봄 밤, 가로등 불빛에 흩어지던 벚꽃 이파리 하나가 유리창에 와 자꾸 부딪치는 시간,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봄날이 가고 나면 시애틀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아이스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달콤하고 포근한 봄 밤의 그림자에 기대 봅니다. 아마, 오늘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 쓰인 함민복 님의 ‘마흔 번째 봄’이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당신이 맞이한 이 봄은 어떤가요? 누구보다 더 가슴 벅차게, 환한 미소로, 봄 꽃 가득 피어난 오솔길을 두 팔 벌리고 걷던 그 모습처럼, 행복한 봄이었으면, 가슴 설레는 봄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이미 그 소망은 이루어졌어요.
당신이 있는 그곳보다 한참이나 먼저 봄이 와 버린 시애틀에서 저는 가슴이 울렁이다 못해 어질어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