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걸을래요?

by 정서진

오늘은 집 근처 matthews beach park에 산책을 갔습니다. 이른 아침, 공기는 차갑고 잔잔한 호수는 햇살에 반짝입니다. 모래사장 앞 물속에 삐죽이 솟아있는 나무 말뚝마다 이름 모를 철새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깃털 속으로 스며들면 화들짝 놀라 후드득 하늘 위로 날아오릅니다. 놀이터에서 회전 그네를 돌리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호숫가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 잔디밭에 앉아 다정하게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 모두 이 작은 공원이 품고 있는 한없이 가볍고 소소한 풍경들입니다. 저도 이 풍경에 그림자 하나 더해 봅니다.

커다란 나무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모래사장이 나오고 작은 철제 망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여기 올 때마다 한번 올라가 봐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저도 모르게 난간에 발을 딛고 천천히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이른 봄날의 호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짙은 코발트블루의 호수 멀리 층층이 포개져 있는 집들과 키 큰 나무들, 선착장, 보트가 놓여 있습니다. 수천 개의 유리 조각들이 호수 위에 떠다니는 듯 반짝이는 물결에 눈이 부십니다. 워싱턴 호수, 바다를 기억하는 이 호수 저 멀리서 명징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 순간, ‘내 언제 또 이토록 멋진 풍경을 보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까칠한 모습으로 서 있던 상처 받은 그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도 여전히 사랑받지 못하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서 겨우 당신을 사랑해도 되냐고 묻던 남자.




1월의 추운 어느 날 미 대사관 비자 인터뷰를 무사히 마치고 교보문고 쪽으로 걸어오는데 건물 벽에 걸린 현판의 글이 제 시야에 들어옵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 가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익숙한 듯 낯선 통증이 폐부를 찌르고 지나갑니다. 한참을 그곳에 서서 글자 하나하나를 꾹꾹 심장에 새겼습니다. 결국은 이런 선택을 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날 시간이 되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또 무엇을 두고 이 땅을 떠나려 하는 걸까. 저 현판의 글이 몇 번이나 바뀌어야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이러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은 차가운 눈송이가 되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집니다. 떠나온 서울에 함박눈이 쏟아질 때 시애틀의 작은 집 창 가에 앉아 두고 온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나 멀리 와 버린 것을 후회하면서 밤을 지새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뒤돌아섭니다.


Seattle. 저는 그렇게 시애틀에 왔습니다.

당신이 없는 이곳으로.


어둠을 걷어낸 나무들이 수런수런 소리를 내는 아침, 햇살이 호수 위에 부서지는 오후, 노을이 풀숲을 헤치고 지척에 스며드는 저녁, 이 작은 공원의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당신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저만치서 내게 온다면 그럼, 전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같이 걸을래요?”


잔잔한 물살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걷는 제 뒤로 당신이 좀 떨어져서 따라옵니다. 코트에 두 손을 넣고 먹먹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걸어옵니다. 혹여 저를 앞지를까 걷다가 잠시 멈췄다가 또 걷기를 반복합니다. 제가 잘 걸어가는지, 걷다가 어느 순간 돌멩이에 차여 엎어지지는 않는지 조심조심 살피면서 걸어옵니다. 봄 햇살과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귀여운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고 있는 당신이 그림자처럼 따라옵니다.


이곳에 와서야 그동안 저를 괴롭히던 이 막막한 슬픔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영원히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장 가까이에서 매 순간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오히려 당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는 이 쓸쓸한 간극은 더없는 슬픔으로 번져옵니다. 하지만 이 슬픔조차도 저를 잠식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이른 아침, 잠이 덜 깬 제게 갓 내린 커피를 내밉니다. 고소하게 퍼지는 커피 향을 맡으며 저는 지난밤 쓰다만 원고 이야기를 합니다. 핍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을 주절주절 풀어내는 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당신은 피식 웃습니다. 우리가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날들이 기적처럼 이 곳에 있습니다.


시애틀의 봄은 또 전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