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내리는 눈

by 정서진

요즘 이곳은 눈부신 햇살에 나무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요. 저는 익숙해진 날들 틈에서 천천히 부유하는 물고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시애틀에는 오월에 눈이 옵니다.


오늘 아침, 커피를 챙겨 문을 닫고 나오는데 무언가 점점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뭐지 하고 다가갔는데, 그 순간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잔디밭 광장 가득 하얗게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서서히 하늘로 날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나뭇잎에, 창문가에,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에 사뿐히 내려앉는 눈송이들. 모든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순간, 오로지 이 눈송이들만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신비로운 마법의 문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세상에 다시없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에 담습니다. 선선한 공기는 이마를 간질이는데 손에 든 뜨거운 커피는 온 마음을 한없이 풀어지게 합니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곧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눈송이들이 황홀하게 주위를 감쌉니다. 손을 뻗어 눈송이들을 잡아봅니다. 차갑고 따스한 무언가가 뭉클,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이 눈송이들의 출처는 cottonwood tree입니다. 씨에 붙은 솜털이 오월이 되면 날리는 거지요. 그렇게 한참을 눈송이들의 즐거운 향연을 지켜보며 저는 또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십 대의 어느 지점에서 느꼈던 그 답답함과 지난한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편해졌을까?


당신은 무덤덤하게 말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일들이라고. 그런데 전 그저 살기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모든 상황이 그대로라면 역시 똑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걸 잃을지 아주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쩔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하게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의 이 무결한 당당함을 좋아합니다. 나는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기나긴 삶을 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나에게 오기는 하는 걸까?

하지만, 인생의 고비마다 숨 막힐 듯 힘들었을 당신이 떠오릅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밀려오는 고통을 꾹꾹 누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남자. 이 고집스럽고 속 깊은 남자가 그 긴 시간 동안 속으로 참고 참아왔던 응어리를 어떻게 풀고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좀 삐뚤어져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관대해 보신 적이 있나요? 가끔은 그래도 괜찮다고 감히 제가 말해도 될까요? 한 번쯤은 확 풀어진 모습으로, 모든 답답함을 벗어 버리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맘껏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세요.

지금도 너무나 아름다운 당신이, 혹시라도 혼자서 숨죽여 울고 있을까 봐 저는 오월에 내리는 눈 한가운데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Golden gardens park에 갔습니다.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 산책하는 사람들, 부드러운 모래밭에서 성을 쌓고 있는 꼬맹이들. 몇몇 아이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놀고 있습니다. 드디어 시애틀에 여름이 당도하려나 봅니다.

이곳 비치는 제가 자주 갔던 안면도 바닷가를 닮았습니다. 바다로 가는 작은 길은 줄줄이 선 나무들과 넓게 펼쳐진 초록의 잔디밭으로 둘러 쌓여 있고 바다 맞은편에는 언덕 위 빼곡하게 자리 잡은 울창한 나무들이 마치 거대한 숲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퓨젯 사운드의 빛나는 바다가 그곳에 있습니다. 이 비치에서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요트들이 정착해 있는 선착장이 있습니다. 시애틀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지만 해질 무렵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은 어쩐지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와인과 치즈를 샀습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요리를 하면서, 포틀럭 파티에 어떤 음식을 만들어 갈지 사소한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체리와 블루베리가 놓인 식탁에 앉아 시애틀의 길고 긴 밤을 함께 할 외로움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당신에게는 쓸쓸한 봄 밤의 그림자가 스며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