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베니스, 베를린 이런 도시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영화’라는 궁극의 지점에 가 닿게 됩니다.
그리고 시애틀
봄날의 시애틀에서는 국제 영화제(SIFF:Seattle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열립니다. 시애틀 지역의 많은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데 반갑게도 우리나라 영화들도 보입니다.
아, 이런 환상적인 축제를 현장에서 즐길 수 있다니! 올망졸망 귀여운 인터내셔널 친구들한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이참에 우리나라 영화 홍보도 하고요. 영화제 브로슈어를 펼쳐보며 어떤 영화를 볼까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애틀의 어느 거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부풀어 오릅니다. 시애틀의 상큼한 봄, 기분 좋게 설레는 이 시간을 독특한 색깔의 작품으로, 열정적인 배우들의 연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 나날입니다.
국제 영화제 소식이 전해지면 레드카펫, 수상 소감,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 축제 이런 일련의 단어들이 연상되면서 저와는 상관없는 먼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하루 제 주변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상입니다.
몇 년 전 그 도시에서 만났던 남자가 떠오릅니다. 복잡한 현실의 무게가 버겁기도 할 텐데 축제를 즐기겠다는 그 남자의 표정은 참으로 해맑아 보였습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던 그는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도시의 풍경이 프레임 가득 들어오고 남자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사람들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에겐 두고두고 기억될 추억이고 제게는 여전히 진행 중인 리뷰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 장면을 꺼내 보면서 저는 쓸쓸한 여행자가 아닌 평범한 한 사람의 관객이 됩니다.
이른 아침, Carkeek 공원에 갔습니다. 퓨젯 사운드와 마주하는 이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붕처럼 하늘을 덮는 나무들로 가득해서 깊고 깊은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 같습니다. 울창한 나뭇잎으로 뒤덮여 햇살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그 길을 천천히 운전하면서 잠시 후 나타날 확 트인 바다를 상상합니다. 백만 년 만에 한번 볼 수 있다는 기차도 봤어요. 바닷가 모래사장과 언덕을 연결하는 다리 밑으로 기찻길이 길게 쭉 이어져 있는데 그 길을 달려오는 기차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기차는 저 멀리서 오다가 바로 제 발 밑을 지나 부드럽게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달려갑니다. 아득히 멀어지는 기차 꼬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 끝도 없이 복잡한 마음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생각해 봅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물고기 뱃속을 통과해 쭉 미끄러지면서 신나 합니다. 철제 계단을 내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나무 둥치에 가 앉습니다. 육지 사이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는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의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거라고. 이 씁쓸한 ‘정리’에는 필연적으로 외로움이 스며듭니다. 그 외로움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바다의 쓸쓸한 푸른 기운처럼 당신이 있는 공간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건 아닌지요.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 또 여지없이 가슴 한구석이 무너집니다. 늘 따뜻하고 다정한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어느 순간 무서울 만큼 냉정함이 느껴져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라고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는 돌아설 것 같아서 제가 먼저 뒤돌아서 버립니다.
우리는 딱 이만큼인 거겠지요. 서울과 시애틀의 거리만큼의 관계.
누군가에게 영화는 현실이고, 치열한 삶의 중심이고, 그러면서도 눈물을 쏟을 만큼 하고 싶었던 연기의 장이겠지만, 제게는 그저 힘든 현실에 대한 도피이고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판타지입니다.
저는 이 모래성 같은 판타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영영 이 판타지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걸까요? 살아남기 위해 억압해 온 무의식의 영역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그런 단단한 현실을 발견하는 날이 올까요?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시상식 무대에 선 그 배우도, 그가 죽을힘을 다해 연기한 캐릭터도, 그 캐릭터를 담고 있는 영화도 제겐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판타지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당신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아니라고 해줄래요? 당신은 현실이라고’
당신은 절대 답하지 않을 거고, 그래서 저 혼자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하려고 애씁니다. 적어도 판타지를 밟고 서 있으면서 현실이라 우기는 비극적인 결말은 맞고 싶지 않으니까요.
삶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다만 용기를 낼 뿐이다.
-배르벨 바르데츠키-
그리고 당신이 결국 용기를 냈듯이 두려움과 맞서 냉혹한 현실의 땅에 힘겹게 한 발자국을 내디뎠듯이 이 어렵고 어려운 삶을 매 순간 용기를 내면서 살아야겠지요. 지금 이 순간도 겨우 용기를 내서 끝까지 현실이라 믿고 싶은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