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시뮬레이션 세상을 만드는 프로그래머
끝없는 어둠 속에서 미약한 빛이 깜빡였다. 거대한 컴퓨터의 거미줄 같은 회로들 사이에서 작은 코드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세계, 그가 의도한 규칙과 구조에 따라 돌아가는 프로그램 속 우주였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작은 창조의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보려는 하나의 실험으로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루나는 시뮬레이션을 을 살펴보며 프로그래머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녀가 보는 시뮬레이션 속 세상은 무수한 개념들이 유기적으로 엉켜있는 혼란의 영역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곳곳에서 서로를 미워하는 불신과 증오가 엉겨 붙어 있었다.
‘가족’, ‘사랑’, ‘우정’, ‘돈’ 같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그 개념들이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처럼, 그것에 얽매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규칙과 윤리를 부과하며 살아갔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경멸하거나 두려워했다. 루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여긴 마치 지옥 같아.”
프로그램 세계를 관찰하던 프로그래머가, 루나의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난 지금 감옥을 만들고 있거든. 죄를 지은 나쁜 생물을 모아둘 공간을 만들고 있어. 이곳에 갇히면 매번 불안하고, 증오하고, 우주처럼 넓은 공간에 자기들만 존재하게 할 거야. 같은 감옥에 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저마다의 도덕, 윤리, 법, 사랑, 가족 같은 가상에 개념에 사로잡힐 거고. 처음엔 그 개념들이 필요했겠지.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였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그것에 집착하게 되었고, 서로를 미워하며 끝없이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될 거야.”
루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저기 저 생물들은 항상 불안해 보여.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사랑이나 우정으로 위안을 받고 있지만, 결국은 사라질 것들이네. 모두 수명이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 속의 정보들일뿐인데,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고 있어. 뭐가 이상한지도 모른 체.”
프로그래머는 어둠 속에서 루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맞아 소멸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지. 그것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고, 소유하려 하며 스스로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지.”
루나는 이 프로그램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미로처럼 보였다. 서로의 믿음을 저버리며 불신과 배신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며 갈등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들을 보고 속삭였다.
“서로 믿고, 평화롭게 지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는 걸까? 다른 종족뿐 아니라 같은 종족끼리도 협력하지 않고 경쟁하고 갈등하고, 때론 의도된 혐오를 조장하기도 해. 약육강식의 세상. 서로 먹고 먹히는 지옥에서 스스로 지성체라고 믿지만 하는 행동은 다른 생물과 똑같아.”
프로그래머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 스스로 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이야. 자신이 만든 개념을 완벽히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미워해. 그리고 그 미움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번지게 되었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니까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가잖아. 그냥 그렇게 설계된 거야. 감옥이니까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지.”
루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프로그램 세계 속의 존재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을 믿지 못한 채,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려 애쓰며 자신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점차 서로를 미워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이곳이 지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스스로 만든 고통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딘가 더 나쁜 곳이 있을 거라며 지금의 자신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사는 게 불안하니 자신이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더 끔찍한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 이곳이 ‘천국’이라고 자위하기도 하고…”
프로그래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그들은 가상의 지옥을 만들어냈고, 현재의 고통을 합리화하지. 현실에서 받는 고통이 그저 더 나쁜 곳으로 가지 않기 위한 일시적인 시련이라 믿으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의존하고, 가상의 위안을 찾아내려고 해.”
루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없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을 위해 사는 건… 너무 허망하네. 그들은 단지 프로그램 속 데이터에 불과한데, 마치 자신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삶을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 허망함이, 그들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 ”
프로그래머는 루나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그들이 만든 개념에 얽매이고, 그 속에서 고통받으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찾는 것도 어쩌면 그들만의 방법일 거야. 의지를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어.”
루나는 창백하게 웃었다.
“그렇군.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이 결국은 허상을 쫓게 만드는 올가미 같아. 마치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자신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방식처럼.”
프로그래머는 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말이 맞아.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지도 몰라. 아니, 깨달아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오직 자기들만이 서로 증오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으니까.”
루나는 이 프로그램 세계가 마치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의 구조물처럼 보였다. 자신이 만든 개념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히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증오를 퍼부으며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은 각자의 규칙과 규범 속에서 그나마 나은 삶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하며 끝없는 증오의 순환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들은 결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겠네."
루나는 프로그램 세계에서 돌아다니며 점점 더 깨달았다. 이곳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감옥 같았다. 이 프로그램 속 세계의 존재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얽매고 속박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속박이 단순히 그들이 만든 개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이들의 시야를 가로막고, 무언가에 기대며 안주하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루나는 깊은 고요 속에서 프로그래머와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프로그래머는 한 가지 더 덧붙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감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어. 사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개념들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구조 자체가 그들을 가둬 두는 감옥이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거야. 그들은 영원히 불안과 고통을 반복하게 되어 있어.”
루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감옥 같은 이 프로그램 속에서 선택의 자유 없이 갇혀 있는 거네.”
“맞아. 그들은 이 프로그램의 규칙 속에 태어났고, 그 규칙은 그들의 사고를 한정 지으며 무한히 반복되는 생의 굴레 속에 가두고 있어. 때로는 누군가가 ‘자유’를 외치기도 하지만, 그 자유 역시 프로그램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야.”
루나는 이들의 삶이 점점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어서 프로그램 세계 속의 사람들에게서 들은 여러 의견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마치 감옥 안에 갇힌 죄수 같아.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도, 결국 이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규칙들이 모두 하나의 벽처럼 느껴지지 않아?”
다른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은 마치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빚을 갚아 나가야 하는 죄수들처럼, 끊임없이 일을 하고 애를 쓰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
마치 자신의 삶이 이 프로그램의 규칙들로 얽혀서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야 하는 필연적인 감옥이라 여겼다.
"왜 우린 사랑하고, 또 결국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서 고통받아야만 하는 걸까?"라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사랑이나 우정조차도 그들이 만든 감정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되어, 그들을 끝없는 갈망과 고통 속에 가두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형벌을 받는 죄수처럼.”
프로그래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이나 억압은 모두 그들 자신이 만든 거야.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집착하면서 그것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이라 믿게 되었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만든 감정, 사랑, 꿈, 성공, 그리고 윤리 같은 개념들이 모두 역설적으로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어.”
루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 세계는 겉보기엔 활기차고 다양한 가능성이 넘치는 듯 보였지만, 그 안은 끊임없는 고통과 혼란의 굴레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고, 그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마치 스스로가 선택한 길인 양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 세계가 지옥이라 불리기 적합한 이유는, 여기가 실제 지옥이어서가 아니야.”
루나는 프로그램 속 세계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저마다 무언가에 쫓기고, 의존하고, 또 서로를 미워하는 그들. 이 프로그램 속에서 벗어날 방법은 분명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 때문에, 벗어날 길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네.”
루나는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서 자신을 가두는 죄수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감옥을 만들고도 그것이 감옥임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속에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아이러니 속에 살아가고 있겠지…. 계속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가상의 개념을 믿으면서... 어쩜 내가 사는 세상도 지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