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ㅏ Sep 10. 2024

앉아있는 캥거루

EP19: 돈보단 내가 소중해

 

 루나는 한낮의 빛이 부드럽게 퍼지는 거리에서 조금은 낡은 느낌의 카페에 눈을 떴다. 창밖으로는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고요한 바람이 섞여, 마치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러던 중 루나의 눈에 들어온 건 길 건너의 벤치에 앉아 있는 캥거루였다. 평범한 모습이 아닌 마치 기다리는 것이 일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캥거루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무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캥거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피로와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잠시 루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루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래. 그게 내 일이거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루나는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캥거루는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예전에 활발하게 일했어. 뛰고, 점프하고, 짐을 나르고. 많은 것을 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회사가 나를 이곳에 앉혀놓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더군. 처음엔 좋았어. 그냥 앉아서 쉬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니까.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독이 되더라."

루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돈이 들어오는데 뭐가 문제야?"

 캥거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간다는 거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어.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아직 의미가 있다는 걸. 하지만 지금의 난 그저 빈 공간에 앉아 있는 존재일 뿐이야. 사람들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도 나를 잃어버려가고 있어."

 루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캥거루의 말은 무언가 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루나의 머릿속에선 무수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사람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캥거루가 말하는 것만을 들어주었다.

 "너는 몰라," 

캥거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한 공포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야."

 그의 말은 루나에게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공허함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왜 이렇게도 힘들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느끼는 평안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캥거루의 눈빛 속에 있는 깊은 피로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가끔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캥거루는 여전히 앉아 있었고,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루나는 알 수 있었다. 캥거루는 루나와 함께 있던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받는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무의미함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 보였다.

“루나, 나는 떠날 거야.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수 없어.”

“정말?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돈을 받잖아. 많은 이들이 그런 기회를 갈망하는데, 왜 떠나려는 거야?”

 캥거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고뇌는 더 깊어져 있었다.

“돈이 전부가 아니야. 처음에는 그저 쉬는 것 같아서 좋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나를 잠식해왔지. 그리고 내가 여기 있으면서 지나가는 동료들이 날 아는 척하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눈치를 주는 거고, 솔직히 좌천되어 앉아있는 것일 뿐이야.”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더 소중해. 그 모든 것이 부서져버렸어. 사람들은 나를 존중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는지조차 모르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어. 돈을 준다는 게 내 자존심을 버려가며 여기 앉아있는 걸 정당화 할 수 없어.”

루나는 그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씩 캥거루가 느끼는 내면의 갈등을 알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캥거루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루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다시 찾아야 해. 의미 없는 시간 속에서 죽어가느니, 차라리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고 싶어.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야.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 필요해.”

 루나는 그가 무언가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찾으려는 결심을 했다는 걸 느꼈다. 그의 눈에 반짝이는 빛은 이전의 무기력함과는 다른 힘이었다.

“행운을 빌어, 캥거루.”

 캥거루는 조용히 웃으며, 작은 손짓을 남기고 루나의 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발자국은 희미했지만, 그의 결단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빈 공간에서 의미를 잃어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전 21화 어린 여우와 분홍토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