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영 Apr 06. 2022

생각하기 나름

    나이가 들어가면 세상일에 초연해진 것인지 웬만한 일에 놀라는 일이 거의 없다. 한국 땅에 굉장한 일이 터져 이곳 뉴욕 타임스에 커다란 머리글자로 1면을 장식하고 여기저기 채널에서 떠들어대도 그냥 '에구 정말 걱정이네, 어쩌면 좋아'하고 혀를 차다가 끝낸다. 재미있는 일도 없고, 흥미진진한 일도 없고, 엄청나게 관심을 기울일 일도 없다. 함께 밥 먹자고 불러낸 친구들하고도 하하, 하고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라도 방긋방긋 웃으면 예뻐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방긋거릴 일이 없다. 그냥 매사에 시큰둥할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싶은 것이, 내 또래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나면 '아이고. 너는 어쩌면 그렇게 안 늙니?' 하면서도 재빨리 눈가의 주름을 세어 보느라 바쁘다. 그 소리를 듣는 친구 역시 '너야말로 정말 고대로다. 나이가 거꾸로 가나 보다' 하며 너스레 떠느라고 신나게 웃어 보지를 못한다. 아주 아주 오래전,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보고도 우스워서 까르르대며 웃던 그 웃음 주머니들도 이제는 나이와 함께 늙어 기력이 빠진 것일까…. 옆에서 웬만한 사건이 터져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일까…. 


그런데 얼마 전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온종일, 그 놀라서 팡팡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일이 내게 생겼다. 철들며 시작했던 달거리가 좋은 세월 보내고 사라져간 지 또 20년쯤 지났는데 느닷없이 아침잠을 깨어 일어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워낙에 좀 무신경하고 게다가 잘 때는 깊이깊이 자는 터라 몰랐는지 알 수 없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꾸물거리는데 무언가 심상치 않아 침대를 살펴보니 아연실색 선혈이 낭자한 것이었다. 그 방면으로는 배가 아프거나 그 어떤 심상치 않은 이상 징후를 느낄 일이 없었고 염려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혈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돌팔이다운 진단에 머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바람직한 진단은 아무리 생각을 바꾸어 보아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다. 멍하니 이 생각 저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병원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태껏 감기 한 번 걸린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폐암이라니….'  '평생 병원에 한 번 가본 적 없이 건강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간암이라니….' 


그렇다. 나야 물론 이런저런 검사는 잘하고 살지만 이런 상태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이 상태에 대한 진단은 자궁암 증상의 맨 윗자리에 나오는 것이다. 나는 어쩐지 위암이니 간암, 혹은 췌장암이란 단어에는 익숙한 것 같다. 내가 코디네이터로 있는 암 환자 서포트 그룹에는 위암이나, 간암, 폐암 환자들이 많은 편이고 수년간 일상생활을 하며 투병 생활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동안 단 한 명, 나이 50살 된 자궁암 환자가 있었는데 진단받은 지 꼭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내린 진단은 바로 그 자궁암인 것이다. 나는 사람이 놀라면 정신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와 근육, 신경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평소와 같이 커피를 내리려는데 커피만 넣고 물을 따라 넣지 않아 메마르게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한참 듣고 난 후 사태를 파악하여 물을 부으려는데 헛손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래, 6개월이다. 이제 6개월만 지나면 내 가슴 위에서 데이지가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런데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자궁암 환자는 그 지난 10여 년간 단 한 번도 부인과 검진을 안 해 보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친 것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나는 1년에 한 번씩 부인과 검진을 받았으며 지난 4월에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이게 무언가…. 나는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두근거리던 가슴은 억울하고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6개월이면 내년 봄. 얼마 전, 앞마당에 땅을 파고 가지런히 묻은 수십 개의 튤립이 한겨울 얼었다 녹은 땅을 헤치고 나와 뾰족뾰족 고개를 내밀 때쯤이다. 봉오리가 트기도 전, 심어놓은 사람은 땅속에 묻혔는데 이윽고 만발한 튤립은 군무를 추는 무대 위의 무용수처럼 자태를 뽐낼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년 봄 출산 예정인 첫 손주를 안아볼 수는 있는 것일까…. 6개월은 너무나 짧다. 


비극의 장은 자꾸만 깊어만 간다. 나는 재빨리 멋대로 그 기간을 좀 늘려본다. 6개월 살다 간 그 환자는 오랜 출혈로 빈혈까지 왔었다. 나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내년 여름에 한국에 다녀오기로 계획했던 것은 어쩔 것인가…. 1년으로 치자. 그런데 1년도 너무 아쉽다. 나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나는 불행한 생각에 젖어있는 타입이 아니다. 생각은 재빨리 턴을 했다.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 몸속은 신비하기도 하고 완벽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멋대로 배반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는 몸의 어느 부분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파져 오는데 '모든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환자가 엄청 많다. 그런 경우 환자들은 아무 이상이 없어 기뻐하기보다는 실망하고 낙심해서 간다. 어쨌든 고통은 남아있는 것이다. 나빠도 좋으니 진단이 내려지고 병명이 밝혀져서 치료를 받고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아무 이상 없다면 이 고통을 어쩌란 말인가…, 그런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몸 안의 미세한 어느 기관이 약간의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실수해서 출혈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일단 그쪽으로 생각을 접기로 했다. 


마침 주말이라 의사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월요일까지 기다린 후 전화를 하니 당장 오라고 한다.  


  “바이옵시(biopsy: 생체 검사)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단호하다. 내가 유방암이나 갑상샘 검사 등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이들은 대개가 암이 아닐까 긴장해 있다.  


  “이 조직검사는 암이 아니라는 견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과 의사 닥터 윤도 내게 똑같은 말을 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래도 별로 위로가 안 되는 것을 알았다. 조직을 뜯어내고(꽤 아프다) 소노그래프(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닥터 윤이 스크린을 가리킨다.  


  “여기 이 부분에 사이즈 3mm 정도의 종양이 있어요, 이번 검사에 양성으로 나오면 6개월 후에 다시 검사하도록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굳이 말하자면 암일 가능성은 10%밖에 안 돼요.” 


절대 암은 아닙니다, 가 아니고 암일 가능성이 10%가 된다니……. 나는 닥터 윤이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중간에 ‘3mm’라고 가리켜진 돌출부 이외에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내 몸속의 신비한 세계를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요즘은 임신하면 초음파 검사로 남녀구별까지 할 수 있지만 내가 아기를 가질 때는 그런 기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궁 안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신비할 수가…. 지금은 어른이 된 내 아이들이 태아 때 처음 머물렀던 곳, 생명이 잉태된 곳, 마치 오래전에 잊혔던 고향의 비옥한 땅을 보는 느낌이었다.


종양도, 조직 검사의 긴장도 그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다 사라졌다. 그 장기가 설사 나를 배반한다고 해도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는 폐기 처분해도 억울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폐경하고 오래 지난 후에 아무 이상 없이 이런 출혈이 가끔 있기도 한데 그 원인은 아마 호르몬 관계일 것으로 봅니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연락하도록 하지요.” 


닥터 윤은 평소에는 아주 재미있고 유쾌한 분이지만 환자와 의사로서의 관계로는 할 말 이외에는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는 것을 안다. 병원 문을 나서며 나는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마음속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기절초풍 놀라서 비극적 종말까지 그려본 처지치고는 대단한 변화였다. 생각을 바꾸고 나니 계산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왔다. 그것이 정반대여서 90%의 가능성이 아니고 10%에 불과하다니 얼마나 좋은가…. 또 설사 90%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갈 길을 서둘러 갈 필요는 없지만, 또 가야 할 길이 있으면 겸손히 받아들이고 가면 될 것을…. 사람의 마음속 늪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비극도 희극도 마음속에 있는 것인즉, 놀라는 일도 이따금 겪어 봐야 좀 더 철학적인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검사 결과 암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지만 6개월 후에 종양의 크기에 변화가 없는가 확인해야 하니 6개월 후에 다시 검사하지요.” 


월요일에 찾아간 닥터 윤에게서 검사 결과를 들었다. 그러나 부인과적인 진단은 그 정도로 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가 무언가를 놓치는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일인즉, 주치의와 상담해보라고 덧붙인다. 


웹사이트에 들어가 결과 내용에 대한 의학 상식을 읽어보니 호르몬 불균형에 의한 증상으로 출혈이 있을 수도 있다, 고 되어있다. 나는 그냥 생각을 접기로 했다. 


얼마 전에 한 환자를 만났다. 그 환자는 온몸의 황달이 가을 땅에 구르는 은행잎처럼 노랬다.  


  “저는 3개월에 한 번씩 반드시 주치의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았어요. 여기 병원에 들어오기 일주일 전 위와 장 내시경을 했는데 깨끗하고 건강하다고 해서 다행이다, 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갑자기 온몸이 가렵고 황달이 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응급실에 가라고 해서 들어왔지요.” 


그 환자는 말기 담관암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위와 대장이 깨끗하면 뭐 하는가, 그 옆 동네가 암세포로 점령을 당했는데…. 이런 생각이 훌륭한 생각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겁이 나서 쫓아다니는 일은 하지 말자. 

생각을 바꾸고 보니 답답했던 일이 갑자기 해결이나 된 듯 편해진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누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