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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광펜 Sep 14. 2022

외신기자에서 삼성전자, 아마존까지

미국에서의 작은 동양 아이 (2)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삿짐만 미리 다 종착점으로 보내고 우리는 미국 서부에서 오하이오 주까지 차를 타고 관광하면서 가기로 했다. 총 3주가 걸린 대장정이었는데, 미국의 드넓은 땅을 최대한 가족들에게 보여주고픈 부모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계획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여행을 지금까지 우리 가족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수백 미터 높이로 물을 뿜는 'Old Faithful' 간헐천도 이때 처음 보았고,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다 같이 만끽했다. 사우스 다코타 주에 들려 들소(buffalo) 햄버거도 먹어보았고 (질겼지만 담백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산이나 언덕 하나 볼 수 없는 광활한 들판을 차로 달렸다. 차에서 저 멀리 소용돌이치는 허리케인도 보면서 손이 저릿 거리는 두려움과 신비함도 느꼈다.


이동수단은 하늘색 미니밴. 동생과 내가 차 안에서 편히 갈 수 있게 마지막 시트는 뜯어내 없앴다. 부모님이 교대해가며 운전할 때 동생과 나는 차 바닥에서 자거나 그림 그리면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어린이 카시트 탑승이 의무인데 매일 8-10시간 운전을 해야만 했던 우리 가족이 구안해낸 차선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몇 날 며칠 달리고 달린 끝에 도착한 오하이오 주. 자연환경부터 캘리포니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게 된 지역에는 큰 강도 흐르고, 숲도 언덕도 많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우리는 지진 강도 규모 6이 넘는 대지진을 겪었다면, 여기서는 집을 통째로 파괴할 수 있는 토네이도를 해마다 주의해야 했다. 오하이오에 도착 후 아버지가 새로 다닐 대학원 기숙사에서 잠시 머무르다 아파트로 이사 갔다.


아파트는 백인들만 사는 아주 작은 마을에 위치했는데, 그 동네 초등학교 학생들이나 선생님도 거의 다 백인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내 동생과 나는 전 학년 통틀어 유일한 동아시아계 학생이었다. 흑인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다. 여러 유색인종과 뒤섞여 있었던 캘리포니아 학교와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초등학교 3학년 첫 주 점심시간. 학교에서 급식이 나왔지만 나는 엄마가 손수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그때 엄마는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를 챙겨줬는데, 안에 잘게 썰은 양파가 들어있어 그 냄새가 카페테리아에 진동했고 주변 아이들은 기겁하는 표정으로 나와 내 손에 있던 샌드위치를 째려봤다. 집에서 항상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쥐구멍에 숨어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른 학생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 학교를 다니면서 많이 깨달았다. 영재반에 들어가게 되어 다른 아이들과 특수 수업도 듣고, 재밌는 프로젝트도 진행했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괴롭히거나 창피함을 주는 선생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특히 한 명, 앨리 클로스라는 여자아이는 내가 그 학교를 다닌 3년 동안 끈질기게 괴롭혔다. 내 옷 색깔이 촌스럽다는 둥, 너희 엄마는 옷을 그렇게 밖에 골라주지 못하냐는 둥 다른 아이들 앞에서 자주 놀렸으며, 심지어 미술시간에 몰래 미술실에 들어가 내 작품을 망치기도 했다. 앨리 근처에 가면 특이한 생선 비린내가 나 다른 아이들이 어울리기 꺼려했는데, 거기서 비롯된 화를 나에게 푸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됐던 건 선생들의 차별과 멸시였다. 어떤 선생이 사회 과목 수업 시간에 뜬금없이 "여기서 미국 시민인 사람 다 손들어봐"라고 지시해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그 당시 나는 이민 신분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미국 시민인가? 아닌가? 몇 초 고민하고 있던 사이에 반 아이들의 손은 모두 올라가 있었다. 내 손도 천천히 올라갔는데 그때 선생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하더니 수업은 진행되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금도 아니지만 물론 당시에도 미국 시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학생들이 근로의 개념을 익히게끔 학교 차원에서 카페테리아 '아르바이트'를 시키곤 했는데, 나도 빠짐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 날에는 급식을 무료로 먹을 수 있어서 나는 식당에서 일하는 날이 기대되기도 했다. 카페테리아 당번이었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피자를 나눠주는데, 식당을 이용하러 온 선생 중 한 명이 나를 혐오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천천히 지나갔다. 그녀가 나에게 한마디 건네지 않았지만, 그때 나를 노려보던 그녀의 안경 뒤 눈빛은 틀림없이 멸시와 혐오를 지니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그녀가 굳이 왜 그래야 했는지 나는 오늘까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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