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가진 게 뭐 있니?

by 티보치나


2020년 일기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몸이 먼저 무너졌다

내 신체반응은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

밥을 먹다가 도 수저를 떨어뜨렸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식탁 위에 길게 울린다.

너무 창피했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J가 물을 때마다 나는 H가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다 얘기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래, 사람은 꼭 행복하게 살 필요 없지.

언젠가부터 너한테 기대 같은 거 버렸어

너 일해서 월급 나한테 주는 거 그건 고맙게 생각해 그건 내가 곧 갚으면 되는 거고.

근데 있지, 다만 내 앞길 막지 마

너 기분 안 좋은 거 티 좀 그만 내.

그냥, 나 합격할 때까지만이라도 억지로 웃어줘 억지로라도 괜찮은척해주라"


하루는 H가 본인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진지하게 물을게 네가 왜 내 앞에 서면

바보가 되는 거야? 왜 내가 널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건데?

미친 척 연기하는 거니?"



"네 가정, 네 트라우마로

우리 가족들한테 영향 안 미치게 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점.

살갑고, 밝고, 네가 우리 엄마한테 잘하는 거

그거 말고 네가 가진 게 뭐 있니?

근데 이젠 그거마저도 못하고 있잖아.

그것도 못하면 넌 왜 살아?


나는 서럽고 분해서 울면서 소리쳤다

"언니가 나를 미치게 만들잖아요

제발 나 좀 쉬게 해 줘요

제발 나 몰아붙이지 말아요"



"나는 내 가족들을 위해서 내 젊음 다 바쳤어

이 집에 내 돈 안 들어간 게 없어

심지어 네가 마시는 물도 내 돈으로 마시는 거야.

난 여기서 내 할 말 다해도 되는 자격이 되지만,

너는 여기가 예비시댁이잖아

넌 J성공이 이제 코앞인데 이것도 못 버텨?

그리고 난 힘들면 내 방식대로 밖에서 풀고 와.

근데 너는 뭔데?

네가 개인적인 일이나, 일문제 가지고

힘들다고 해서 네가 네 방식대로 꾀병 부리는데 가짢어. 사람은 언젠가 다 죽어.

우리 엄마도 나보다 먼저 죽을 거야

근데 그게 왜? 이제 시간이 좀 지났잖아

왜 아직 그런 표정으로 지내는 거야?

내가 누누이 말했지

바쁘게 살면 그런 거 안 걸려 배부르게 살지 마

여기 들어와서 먹고살기 편해져서

우울증 같은 거 걸리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무너뜨릴 때 반드시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조용한 목소리로도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부서뜨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부서졌다.



나는 집안에선 늘 밝게 있으려고 노력했고,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엄마 일로 눈물을 보여준 적 없다.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게 보였나 보다.

그게 달갑지 않았나 보다.


"언니, 저 나가서 살게요. J공부집중하는 데에도

나을 거 같고 언니 말대로 저는 여기서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같아요

직장도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H한테 절대 장사 배울 생각도, 업을 이어갈 생각도 없다.

가게에선 악마처럼 굴더니 집에 와서 가족 앞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상하게 내 이름을 부르면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걱정해 주고

토닥여주면 금세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다.

여기 집안 식구들은 덮어두고 묻어두고

더 보채고 더 바쁘게 움직이게 하고

몰아세우며 가게 매출만 얘기하면서

얘기만 한다. 바쁘게 살지 않아서

울증이나 유가족 후유증이 온다고 했다.

너무나 쉽게 말해버린다. 나는 참는다.

나만 입 다물고 '네 맞아요' 하고 동의하고 넘어가버리면 아무 일 생기지 않는다.

만약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라든가

'하기 싫어요'라고 내 생각을 말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어쩌면 나는

엄마아빠의 죽음보다 이 가족 간의 갈등으로

매시간 온몸이 긴장되고 이상해 진 거 같다.

아니면 그냥 내 존재자체가,

내가 그냥 이상한 사람인 걸까

이 모든 알 수 없는 우울의 원인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그 답을 아직도 모른다

사람은 보통 한 번에 부서지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너진다

나는 그 사실을 이 집에서 배웠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결국 완전히 망가질 것 같다는 것을. 하지만 이 집에서 도망가지 못하겠다.

나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사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고 숨이 얕아졌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칼날처럼 들렸다.

그 집안에서는 아무리 숨을 쉬어도 숨이 차올랐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아니,

도망쳐야 한다.

가능한 한 멀리,

그 집에서

그 사람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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