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시절 일명 왕따였다.
얼굴 전체에 뒤집힌 아토피 피부는
내 자존감을 바닥나게 했고, 내 별명은 '멍게'였다. 멍게처럼 피부가 빨갛고 각질투성이에
보기흉할 정도로 안 좋았다. 가슴에도 아토피가
있었는데, 한 번은 수업시간 너무 간지러워서
박박 긁은 나머지 브래지어에 각질과 진물 이 묻혀
딱풀 붙어있듯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살살
떼어내는데 진물이랑 피가 섞여 나와 화장실에 가서 연고를 바르고, 분을 바르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내 이름과 똑같은 같은 학년배에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애는 예뻤다.
그래서 애들은 '누구 oo를 말하는 거야? 멍게새끼? 아니면 그냥 oo?' 하면서 구별했다.
또래 중 몇 명은 협박하면서 며칠까지 돈을 가져와라, 어떤 옷을 사와라, 말을 듣지 않으면 선배들을 데리고 와서 나를 괴롭혔다.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부터 너는 내 양동생이야.'라고 하며 매일 코인노래방에 가서 선배들에게 돈을 바쳤다.
그 시절에 핸드폰을 알충전해서 썼는데,
매일 알충전도 협박하고 충전해서 뺏어가고,
핸드폰도 가져갔다. 어느 날은 사물함을 열어보니
시큼한 기분 나쁜 냄새가 났는데,
생리가 잔뜩 묻은 생리대였다. 자신들이 쓴 생리대를 내 사물함에 장난 삼아 쓰레기통에 쳐 박아두는처럼 모아서 넣어두곤 했다. 체육복, 교과서를 빌려가고는 주지도 않았다.
나는 교실에서 그런 존재였고, 유령 같은 존재였다.
3학년이 되어서도 1학년후배들이 급식을
다 먹고서야 텅 빈 급식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늘 보고 살았다. 항상 눈이 풀려있었고,
새벽만 되면 속옷만 입고 나와서 좀비처럼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꺼내 퍼먹고는 했다.
그래도 할머니, 아빠는 나에게 다정했다.
아빠는 내 교복을 직접 손수 빨래해 주시고,
할머니는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다.
그래서 꽤 버틸만했다. 하지만 난 늘 불안했고,
뭔가 특이한, 우울한 아이였다.
그 무렵 자우림 음악을 듣게 되었고 음악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Alanis Morissette, Oasis, Jet, Stacie Orrico,
Avril Lavigne, U2, Nirvana,
The Beatles, Cranberries 등등.. 모던락의 매력에
빠졌다.
다른 애들이 아이돌노래 들을 때는 나는 망향, 샤이닝,
팬이야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고,
그때 알았다.
내가 가야 할 길, 내 꿈이 생겼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용음악학원 등록해 달라는 말에 부모님은 황당해하셨고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절대 대상 받지 못할 거란 걸 확신한 부모님은 알겠다고 했고, 나는 혼자 학교 음악실에서 독학을 했다. 음악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밴드부를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말이 있었지만
내 성격상 애들과 교류하기도 힘들었을뿐더러
전적으로 내가 기타, 베이스, 드럼 등등 학생들을
모집해야 했기에 포기하려던 찰나,
나는 청소년가요제에서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자우림 '팬이야'를 불렀다.
당시 가요제를 준비하고 있었던 동급생은
나를 시기질투하면서 더 괴롭히려던 애들도 있었고,
대단하다며 어디 학원 다니냐고 갑자기 친한척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그 자리에 오지 않으셨다. 나는 나 혼자 대상의 기쁨을 만끽했고
내가 노래에 재능이 조금은 있구나 하며
내 노래를 다른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았을때의
그 성취감, 뿌듯함, 행복감..이루말할수가 없다.
이후,내 지역에 있는 대학축제에도 초청받아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목표가 더 뚜렷하게 생겼다.
당당하게 대상 받은 것을 부모님한테 보여주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를 실용음악학원에 등록시켜 줬다.
나는 보컬 외에도 시창, 청음, 화성학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학교 음악선생님이 제안했던 밴드부도 결성하기로했다. 자신감이 생겼고,
나를 괴롭히던 애들에게
'나 이정도다,나 원래 이정도 급이다.'라고
보여주고싶었다. 밴드부 아이들을 뽑기 위해서는
심사를 진행해야 했고, 생각보다 엄청 많은 아이들이
보컬, 기타, 키보드,베이스, 드럼에 참가했다.
특히 보컬.
그중에는 나를 괴롭히던 애들도 있었지만
실력만 보기로 했다. 심사당일, 그 애들은
나를 보고 쭈뼛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탈락
탈락
탈락.
(솔직히 아예 사적인 감정을 없애고 심사를 본 건 아니었다)
나보다 1살 후배인 학생이 보컬로 뽑혔고
그렇게 oo여자 중학교 제1기 밴드가 결성되었다.
밴드를 하면서 내가 리더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다른 악기들도 공부했다. 그렇게 생활하고 지내다 보니
내 성격은 점점 털털하고 밝아지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밴드부 연습을 기본 2시간 하고,
연습이 끝나면 실용음악학원에서
학원 문 닫을 때까지 피아노를 치며, 노래연습을 했다.
학교에 등교하면 매일 마스크만 끼고 있던 내가
당당히 마스크를 벗고 다녔다.
괴롭힘도 줄어들었다. 더 이상 내 사물함에
자신들의 생리대를 휴지통처럼 쳐 박아두는 일이 없어졌다.
점심시간엔 이제 혼자 밥 먹지 않고,
우리 밴드팀들과 다 같이 밥을 먹었다.
졸업식날 우리는 멋지게 피날레 장식을 했고, 환호성도 받았다.
무대에 섰을 때 그 짜릿함, 마이크를 잡고 대중들 앞에서 내 노래를 부를 때 그 떨림과 감동.
고등학교진학 무렵, 중학교 시절처럼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에 뒤덮여있던
각질들, 아토피 피부를 보란 듯이 드러내고, 하지도 못하는 화장을 그렇게도 해댔다.
아이라인을 그리고, 교복도 줄이고, 성격도 개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한 순수한 친구가 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와! 이 머리 어떻게 한 거야? 뽕 전다!! 멋있어'
어쩌다 보니 참 좋은 친구를 4-5명 사귀게 되어
그 무리에서 지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교복도 편하게 입고(?) 화장도 안 하고 평범한
진짜 내 모습으로 편하게 고등학교를 다녔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좋은 친구들과 우정도 쌓고
부모님은 여전히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내가 밝아지고 꿋꿋하게 노래도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학원만은 그만 다녀라고 하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왜냐면 집에 돌아오면
아픈 엄마를 보고, 무기력한 아빠를 보는 것뿐
집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도 엄마가 다리 주물러달라고 하면 주물러주고, 아빠의 잔심부름도 잘 다녀오고 나름대로 잘 지냈다.
19세, 나는 이제 대학을 준비하는 시기가 왔다
당연히 실용음악과를 지원했고, 선생님은
본인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하면 장학생으로 입학해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지방대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누가 들어도 '아 그 학교? 대박이다!
최고다! 실력 대단한가 보네' 하는 학교를 가고 싶었다.
총 4군데를 지원했고 2군데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내 입시곡은 휘트니휴스턴 I have nothing.
하지만 가지 못했다. 어딜 내놓아도 좋은
대학교를 합격했는데, 나는 그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첫번째는 입학금이 문제였고,
나는 고등학생 때 J랑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J는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말했다.
'너 그렇게 혼자 있지 말고.. 여기로 이사올래?
오빠랑 같이 있자 오빠 이제 곧 시험에 합격하면
그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그전까지 혼자 있지 말고 오빠랑 같이 살자.
음악도 여기 와서 공부해, 도와줄게.'
.... 내 꿈은 여기서 끝이 나기 시작했다.
내 삶이 고통인 것과 별개로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큰 이벤트까지 후회되는 사건들이 많다.
그중 제일 후회되는 건 J를 사랑하게 된 것.
J를 따라 거주지를 옮겨 그 집에 들어가,
H가게에서 일한 것.
나는 그곳을 갔을 때에도 처음엔 음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같이 음악 했던 친구들을 만나 포항, 부산, 대구,
서울 왔다 갔다 하며 버스킹을 했다
2012년 당시, 버스커버스커가 나오기 전 여자 둘이서 길거리에서 팁박스 놔두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른다는 게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해했고 좋아했다.열광했다.
그때부터 나는 J와 함께 있었어도 초반에는 음악을 쭉 했다 나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유튜브 채널도
운영했다. 라이브클럽에서도 공연하고,
시간 나면 버스킹을 꾸준히 했다.
가끔 밤에 하게 되면 소음신고로 경찰분들이 오고 가고 하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진짜 재밌었다.
나는 그 시절 J에게 꾸준히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돈을 벌어라고 했다. 점점 내 꿈이 주눅 들었고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는 땡전 한 푼 없이 기타만 매고 서울로
올라가, 지금은 크게 성공했다. 유명한 가수가 된 친구들, 오빠들도 있다.
너무 축하할 일인데, 한편으로는 질투가 난다.
그 시절 함께 노래했을 때는
분명히 같은 레벨이었는데 지금은 밥도 한번 제대로 편하게 먹기 힘든 사이가 되었다.
나는 외롭고,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J를 만났고
J가족들은 외로운 나를 정말 잘 보살펴주셨다.
처음 그 집에 들어가기 전까진.
이석증, 공황장애를 처음 겪었을 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그 작은 창고 안에서
'너는 네가 쳐 맞을 수 있단 생각 안 해봤어?
하나부터 열까지 밥 먹는 습관까지 다 가르쳐야 해? 죽어 그냥 죽어.'
도망칠걸.. 도망가버릴걸..
그땐 서로에게 너무 강하게 끌렸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진짜 가족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따뜻한 밥, 깨끗한 집이 좋았다.
너무 강하게 이끌리고 매몰되면 부딪히고
깨지기도 쉽지.
앞을 쳐다보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나의 선택에도 화가 나고, J에게도 화가 나고
나는 그 시절, 그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몰라
나를 탓하며 내가 잘못된 거라며 가스라이팅에
완전히 지배되어 살았다.
20대 시절을
그렇게 살았다.
그곳에서의 삶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아무 힘이 없었다.
나는 도망쳐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갈 곳이 없었고, 혼자 힘으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쁜 일들은 한 번에 몰려온다던데 그렇더라
몸으로, 마음으로 신호가 왔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삶의 절반이 무너져내려 갈 때, 무기력하게 나 자신을 버렸다.
통증이 장기화되면 결국 쓰러지고 만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엎지르고 싶다
그래서 그때를 다시 줍고 싶다.
지금은 차마 노래를 부를수가 없다.
코인노래방도 가지못한다.
그시절 내실력이 나오지않기때문에,목이막혀서
노래를 부르면 속이 상하고 슬프다
더이상 노래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원래 전공이 뭐였어?라고 묻는사람이 간혹있다. 음악이었다고 말하면
노래잘하겠다며,노래방 한번 가자고 하는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에코가 듬뿍들어간 마이크를 잡고도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다 내 노래실력이 화가나서,서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