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 필모그래피 조각 모음 하기
ADHD의 삶은 실수와 실패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울증, 불안장애 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걸핏하면 주의를 놓치고 행동이 앞서니, 더 설명이 필요치 않겠다. 안 그래도 허우적대는 와중에 우울과 무기력까지 닥쳐오면 어찌 되겠는가. 꼼짝없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나는 인간이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조각 모음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을 복기할 때면 제삼자가 되어 어떤 장면을 관람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연극, 영화, 소설, 그 무엇이든 한 편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처럼 모든 이야기는 이미 쓰여 있다. 다만 우주라는 무대 위에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연될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가 상연될 때, 우리는 그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이다. 작품에 따라 주연이었다가 조연이 되기도, 때로는 엑스트라로 지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러한 의식은 나를 한결 가볍게 만든다. 몰입으로부터 잠시 빠져나와 전체를 인식할 여유를 준다. 모든 순간이 어떤 작품의 일부일 뿐이라면, 클라이맥스도 완결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싱거운 코미디든 언젠가는 반드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장르에서든 사건이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할수록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또한 결핍은 입체적인 주인공의 미덕이며, 시련과 갈등은 서사의 필수 요건이다.
이 사실들을 알고 있기에 이야기의 격랑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오는 한편,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말에 다다라서야 단편적인 사건들의 의미와 복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마저도 언제든 재해석될 여지를 남겨두고 말이다. 지금의 고통과 시련도 생의 선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완성된 작품은 다시 ‘나’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그리하여 나의 존재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작품에 마침표를 찍어야만 비로소 선명한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그전까지는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고 구성될 뿐이다.
나는 필모그래피를, 나라는 존재를 극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선택지는 그간 만들어온 작품들을 바탕으로 주어지겠지만, 선택은 오로지 내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망작을 만나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만 하다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ADHD라는 결핍에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이다. 최종장의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될 테니까. 무한한 가능성이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의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오직 나만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