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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좋은 계절, 여름

by 거의 다온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이재무, 「나는 여름이 좋다」 中



한 주간 갑갑한 시간을 보냈다. 예고되었던 비는 내리지 않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소낙비가 내렸다. 7월의 맹렬하던 햇빛도 조금은 누그러질 여름의 끝자락. 그런데도 발걸음은 자꾸만 더 무겁게 꺼져 들어갔다. 여름을 가장 사랑했던 내가 어느새 여름을 미워하고 있었다.


퇴근길, 거리의 유리문에 내 모습을 비춰보면 처진 어깨에 작은 키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흘러내리는 땀이 내 안의 결핍까지도 낱낱이 드러내는 듯했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빛나던 내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자꾸만 나를 할퀴는 여름이었다. 살려보려 물을 줄수록 축 늘어지는 이파리처럼 힘없이 가라앉는 나날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더니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손이 닿는 무엇이든 붙잡고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숨이 차올라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질 때쯤 깨달았다. 나를 무너뜨린 게 나이듯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야 해. 다시 달릴 시간이야.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이 언제 어두웠던 적이나 있었냐는 듯 밝은 새벽 5시 반.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바다를 닮아서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매미들은 여름이 떠나갈 듯 우렁차게 울어대고, 그 소리에 나무들이 이파리를 흔들며 기지개 켜는 새벽이었다.


여름에 기분 좋게 달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 타이밍을 잡으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주말인 오늘은 종일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운 뒤 해질 무렵 집을 나섰다. 저녁 7시 반, 느리게 저무는 태양을 배웅하며 달리기에 완벽한 시각. 미지근한 바람과 저녁놀에 반짝이는 호수의 윤슬을 들이마시니, 갑갑했던 마음이 한순간 청명해졌다.


한참을 달리다 멈추었을 때, 하늘은 보랏빛과 주황빛으로 물들며 마지막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풍경 앞에 앉아 숨을 고르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속으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을, 수면 위로 번지는 노을빛과 가느다란 빗방울들의 흔적을 마음에 담았다. 역시나, 여름의 탓이 아니었다.


찰나에만 머무는 풍경이 있다. 돌아보면 이미 사라져 있는, 꿈처럼 덧없이 아름다운 풍경. 여름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기세 좋게 뻗어나가다가도 금세 주저앉고, 시름시름 앓다가도 한순간 솟구쳐 오르는 계절. 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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