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 1녀 중 장남으로 유년시절을 보내다...
아버지는 조부모님 슬하 4남 1녀 중 맏이인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1945년 10살도 안 된 해방전후의 힘든 시기가 당신의 꽃 같은 유년시절과 맞물리며 어린 나이 때부터 줄줄이 달린 코흘리개에 수시로 아파 생사를 넘나들던 병약한 어린 동생들을 하나하나 챙겨야 했고 특히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남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당시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면서 영천현장에서 고향인 오천읍으로 돌아오고부터는 가족들의 생계와 생활을 돌보기는커녕 매일 외박하며 음주가무와 주색잡기에 빠져 떠돌이 부랑자처럼 사시다 시피 하셨고, 친척들에게 야단도 맞고 심한 욕을 먹으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돈을 빌려 투전판과 기생집등을 전전하시며 방탕하고 너무도 피폐한 무책임한 폐인 같은 생활을 하시다 환갑을 1년 앞둔 1962년 정월 한겨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는 물론 가족 모두를 진정 힘들게 하셨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투정 부릴 사이도 없이 일찍부터 강제로 철이 들어야 했고 마을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한 집안의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며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고 한다. 감수성 예민하고 혈기왕성하던 십 대 초반 이후의 유년시절 철이 들기도 전에 한 집안의 어린 가장 노릇을 강제로 해야만 했기에 매일매일이 지옥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어느 집이나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기라 유일한 끼니의 해결방법은 오로지 깊은 산에서 땔감으로 나무를 해와서 오천시장에 내다 팔 거나 이곳저곳 공사판을 기웃거리며 밥이나 세참을 얻어먹고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품삯으로 보리쌀이라도 배급받으면 그것으로 할머니와 동생들 여러 식구들을 돌봐야 하는 힘든 삶을 살아오게 되신 것이다.
그러던 중에 1950년 6. 25. 한국전쟁이 터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부터 우리 마을에도 밤과 낮으로 무장공비와 국군이 마을에서 기싸움을 하며 공존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혼란과 이념의 분쟁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아버지도 밤이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어의 없이 붙들려 여러 차례 두들겨 맞거나 죽창을 들고 집으로 때로 몰려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그렇게 힘들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당시 많은 순박한 시골 마을사람들이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평소 듣도 보도 못한 말라비틀어진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전혀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어느 한쪽을 어설피 도와주거나 잘 못 호의를 베풀고 활동에 관여를 하게 되면서 심하게 매를 맞아 다치거나 무자비하게 총칼에 목숨을 잃는 이도 마을에 적지 않았다고 한다. 되돌아보면 아버지도 1953년 휴전하기까지 당시 몇 번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가 심한 매질과 폭행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래도 기적처럼 어찌어찌 살아남아 그 암울했던 시기를 운 좋게 넘겨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참 아찔한 기분만이 든다고 하신다.
먹고살기도 팍팍하고 배고픈 전쟁통 당시에 전혀 영양가 없는 이념의 차이로 서로 죽고 죽이는 그런 약육강식의 시대였고 내가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고발하고 죽여야 하고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논리가 그 어린 시절에도 분명했다고 한다. 특히 전쟁보다 무서운 가난과 먹을 것이 없는 전시시절에 그렇게 굶어가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라 말씀을 하신다.
돌아보면 당시에는 낮에는 국군들이 저녁에는 무장공비들이 마을을 서로 공존하면서 각 상대방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을 서로가 탄핵하고 즉결심판 겸 처치하는 그런 밤낮의 피의 역사가 흘러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는 참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상황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힘든 시절을 운명처럼 받아내고 살아낸 기적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모두 다섯 분이었다. 장남인 아버지와 세 살 아래 여동생 고모님과 그리고 다들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셋째 복희 삼촌과 할머니를 꼭 빼닮으신 넷째 석희 삼촌 그리고 몸이 불편하고 장애가 있으시지만 의지력과 노력만큼은 최고로 대단하신 아버지와는 거의 20년이 넘게 나이차가 나는 다섯째 막내삼촌 익희 삼촌 이렇게 오 형제가 아버지의 형제이고 동기간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몇 차례 유산까지 더하면 아마도 형제는 더 있었을 것이 분명 하지만 그래도 당시는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라 입하나 줄이는 것이 큰 일이었기에 어쩌면 더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웃어 보이신다. 특히나 아버지 형제분들 중 이석희 삼촌 위에 복희삼촌이라는 형제분이 한 분더 계셨지만 가족들과 친척들 대부분 아버지 형제분들 조차도 이름도 존재도 모르고 있다. 복희 삼촌은 그렇게 7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아쉽지만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복희 삼촌 이야기를 하시면서 얼굴이 어두워지신다. 삼촌은 누구보다 총명하고 머리가 너무도 비상한 똑똑한 동생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영재이거나 천재라고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천자문도 곧잘 외우고 말도 총명하게 잘하는 그런 영민함이 남다른 동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기억 속에 각인된 복희삼촌은 누구보다 똑똑한 동생이었고 참 아까운 아우였지만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가족들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어쩌면 당시에 복희 삼촌은 홍역으로 돌아가신 것으로는 되어 있었으나 아버지는 분명 홍역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은 것 같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말씀을 자꾸만 하신다. 당시에 같은 집에서 아이를 동시에 둘 이상을 낳으면 태어난 아이들 중 누군가에게는 단명하거나 팔자에 좋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풍습과 미신 같은 헛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들 사랑채에서 머물고 전전긍긍하며 힘들게 살아야 했기에 할아버지의 무능함으로 하루하루 친척집들이나 마을 대나부밭에 임시 거쳐를 마련해 생활하던 상황이었기에 아버지는 그런 피해의식 속의 생각만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당시의 마을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빌어먹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똑똑한 동생이 멀쩡하게 같이 놀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홍역으로 죽었다고 하니 당시는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해서 아버지는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먹고살기도 힘들고 입하나 덜어야 하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같은 시점에 태어난 친척집의 아들에게 기운을 빼앗기고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억지로 복희 삼촌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도 가지고 계시는 모양이었다. 물론 전혀 확인된 바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절대 확인도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4남 1녀의 장남으로 유년시절을 힘들게 보내시고 4형제와 의지하며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