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기록하는 것도 여행이다
여행 둘째 날, 어제는 밤의 에펠탑을 보았고, 오늘은 낮의 에펠탑을 만난다. 관광객이 많을 경우 에펠탑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변수가 생길 수 있어, 어제보다 조금 일찍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서둘러 도착한 곳은 다행히 대기줄이 길지 않았다. 오픈런을 하러 온 것이, 어제보다는 날씨가 좋은 오늘 방문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펠탑을 눈앞에 원 없이 세워두고, 가이드님 설명도 들으며 여유롭게 대기했다.
프랑스는 1889년 세계 만국박람회를 위해 설계 공모전을 내걸었는데, '구스타브 에펠' 팀이 그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에펠탑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민들과 예술가들은 미관을 망치는 흉물이라고 격렬하게 반대했고, 시공 자금 지원도 적었지만 에펠은 본인 자금을 투입해서 타워를 완공시켰다. 에펠탑은 원래 철거 예정인 임시 구조물이었지만, 에펠의 연구로 전파와 통신의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철거를 막을 수 있었다.
에펠탑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까지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히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시간 후, 입장해서 에펠탑 가까이 자리를 이동했다. 사진 한 장으로 담아내지 못할, 엄청난 규모의 고철 구조물이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전망대에 올랐다. 도착했을 때, 철골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눈앞에 파리 시내 전경이 펼쳐졌다. 잠시 실내로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를 사서 나왔다. 돈을 지불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건네받았다.
엄마와 사진을 찍고, 풍경 사진을 찍고도 자유시간이 남았다. 문뜩 짧게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어폰을 꽂고, 이곳에 어울리는 노래를 검색했다. 그리곤 스텔라 장의 'L’Amour, Les Baguettes, Paris' 노래를 반복 재생하여, 천천히 에펠탑을 한 바퀴 돌았다.
북적이는 세상 속 나에게만 들리는 노래, 그 잔잔한 감성, 스치는 바람, 그리고 눈앞의 경치. 행복을 만나기까지 10분이면 충분했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원할 때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바로 행복이고, 여행할 때 나는 행복하다.
내려와서는 현지 레스토랑에서 달팽이 요리인 에스카르고를 포함한 코스 요리를 즐겼다. 식사 후에는 백화점을 방문했다. 아이쇼핑 하면서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을, 가방을 기분 좋게 다 사드릴 수 있는 날이 언제라도 빨리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서너 번은 더 했던 것 같다.
현실은 디저트로 마카롱을 사 먹으면서, '프랑스 마카롱을 다 먹어보네' 하며 만족해야 했지만 말이다. 돈을 열심히 그것도 많이 벌어야 할 이유는 늘 어디든 백화점을 따라다니는 듯하다.
오늘 여행 중 가장 중요한 일정은 리옹역에서 무사히 기차에 탑승하는 것이다. 다섯 시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인솔자님 재량으로 일정표에 없는 '노트르담 대성당' 관광이 추가되었다.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센강 다리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는 데,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은 '부활절' 연휴 당일이었다. 성당에 입장하려고 줄을 선 관광객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대성당 내부 관람은 포기하고, 벤치에 앉아 외관을 감상했다.
왼쪽 오른쪽, 건물이 얼마나 좌우대칭인지를 비교해 가며 보았다. 두 번째 유럽이어서 그런 지 건축물들을 볼 때마다 항상 대칭성의 멋을 먼저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덕분에 멍하게 구경하면서도 나름의 감상법으로 관광을 즐겼다. 시끌벅적했지만 따사롭고 여유롭게 앉아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외관이라도 볼 수 있어서 만족했다.
스위스로 가기 위해 리옹역에 도착했다. 일행 모두 캐리어를 들고 2층까지 짐을 싣어야 해서 탑승 전부터 모두들 결의에 찬 마음으로 준비했다. 서로 도와서 다행히 모두 무사히 열차에 올랐다.
도착할 때까지는 각자의 휴식을 취했다. 도시락을 먹고, 간식도 먹으며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열차가 빠르게 지나쳐도 시야에 남는 푸른 들판과 노란 유채꽃을 바라보니 기차 여행이 실감 났다.
작년처럼 김민철 작가님의 책을 챙겨 왔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 독서하기 가장 좋은 순간임은 확실했다. 엄마에게 좋아하는 작가님을 소개했지만, 엄마는 사진첩을 정리하는 시간이 더 즐거워 보였다.
책을 편 후 첫 페이지의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이 문장부터 벌써 마음에 들었다.
그 어떤 여행기도 여행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말해볼 생각이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굳이 종이를 낭비해 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 말이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김민철 작가님의 여행 기록은 여행만큼이나 표현이 참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가며 혼자만의 행복을 챙겼다. 여행 노트도 꺼내서, '나는 여행 중 이동 시간, 틈새 시간에 이렇게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끄적였다.
책과 노트를 가방에 넣고, 주섬주섬 챙겨 온 스티커를 꺼냈다. 어느 순간부터 멍하게 빈 공간에 스티커 꾸미기를 하는 데 흥미가 생겼다. 파리 시내에서 산 엽서 뒷면에 스티커를 요리조리 붙이며 신중하게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집중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했지만, 그래도 완성하고 나니, 프랑스 여행을 잘 마무리하고 스위스로 갈 준비를 끝낸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휴대폰을 충전시키면서 잠시동안 눈을 붙였다.
지난 유럽 여행 때는 '책'과 '여행 노트'로 여행의 맛을 더했다면, 이번에는 '엽서 꾸미기'로 시간을 여행했다. 도시마다 엽서 한 장씩을 사서, 그 위에 추억을 옮겨 담는 방식. 이미지로 한 도시의 매력을 취향껏 담아낸다. 여행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추억할 지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여행을 기록하는 시간 또한 또 다른 '여행'임을 느꼈다.
가이드님이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분, 그 안에 28명 일행의 모든 캐리어를 들고 내려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타고 있는 칸에는 다른 단체 팀도 있어서 어수선했다. 짐의 위치를 알려주고, 여성분들이 먼저 1층으로 내려가고, 남성분들이 도와서 짐을 내리기로 하였다.
도착 10분 전부터 열차가 서는 그 순간까지 우리 모두는 비장했다. 반드시 해내야 했다.
각자의 위치에 서서 짐을 내려놓고, 전달하고, 1층으로 내리고, 기차 밖에서 짐을 받았다. 마지막 캐리어가 나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요란법석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왕좌왕은 없었다. 한국인답게 힘을 합쳐 분실된 짐 없이 하차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우리는 스위스로 갈 준비를 마쳤다. 참 추억할만한, 색다른 기차여행이었다.
역 밖으로 나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인터라켄 근교 지역으로 이동했다. 어둑어둑해진 밤, 찬 공기가 실감 나는 스위스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로 들어가서 다음 날 융프라우 관광을 위해, 짐을 정리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부디 내일 날씨가 좋길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