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타이밍이다
처음이 어려웠지...
작년 첫 유럽 여행의 감흥이 가시기도 전에, 조심스럽게 또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또 떠날 결심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는 고민 없이 서유럽으로 정했다. 동유럽 다음은 서유럽이었으면 했고, 이왕이면 동서남북 순서대로 유럽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패키지여행을 택했다.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첫 여행이자, 두 번째 유럽이다.
패키지여행이다 보니 이번에도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정표를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할 장면들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만 챙겼다. 특별하게 챙긴 건 여행 노트, 책, 필름카메라, 그리고 여행 꾸미기 스티커 정도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감정이, 어떤 생각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을 챙기는 것을 끝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작년처럼 새벽부터 부지런히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공기와 북적이는 여행객들 사이,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속하니 그제야 여행이 조금씩 실감 났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은 곧장 아찔한 에피소드 하나로 이어졌다.
갑자기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항공권 셀프 체크인 기계로 여권을 스캔하는 데 계속 오류가 났다. 엄마의 여권을 인식하지 못했다. 옆 기계에서 시도했는 데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엄마가 갑자기, 구 여권을 가져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자리에서 둘은 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을 뱉어낸 엄마는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적이 흐른 뒤, 엄마는 여권을 다시 보더니 갑자기 이 여권이 맞다고 확신하셨다. 재빨리 다른 기계로 옮겨서 시도했더니, 두 어번만에 기계는 항공권을 뱉어냈다. 심장이 어찌나 콩닥콩닥 뛰던 지,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당황한 나머지 스스로를 의심했던, 울음이 터질 뻔한 엄마의 표정은 그 짧은 시간의 모든 아찔함을 말해주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비몽사몽 했던 정신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행을 무사히 떠나는 것 자체도 어쩌면 감사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시작을 이겨내고, 그렇게 다행히 여행길에 올랐다.
14시간의 긴 비행 끝에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안전하게 무사히 도착해서 감사한 마음과 새로운 여행지를 마주하는 설렘이 교차했다. 어수선할 겨를도 없이, 준비된 리무진 버스에 타고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여유롭게 간단한 짐만 풀고 일찍 잠을 청했다. 오로지 다음 날을 위해 체력을, 에너지를 아꼈다.
그렇게, 본격적인 여행날의 아침이 밝았다.
작년 동유럽 여행이 워낙 완벽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보니, 이번 여행 또한 그만큼의 기대에 부응하길 바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서유럽 여행은 완벽보다는 '변수의 연속'이었다.
여행 첫날, 인솔자님의 첫마디는 이러하였다. "인솔자가 유럽 여행 오기 꺼려하는 시기가 있는 데, 안타깝게도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들은 제일 바쁜 시기에 딱 오셨네요..." 그러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기는 부활절 연휴이자,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었다. 그리고 부활절 다음 날, 이탈리아로 넘어가기 직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종하셨다.
다행히, 여행 중 마주한 변수들은 운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 관광 순서를 바꾼 날이 여행하기 더 좋았던 적도 있고, 로마 바티칸 박물관도, 시스티나 성당도 관광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관광한 바로 그다음 날부터 그곳은 콘클라베 준비로 그 기간 동안 폐쇄됐다.
날씨 변수도 있었는 데, 참 신기하게도 날씨마저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파리 센 강 투어와 이탈리아 아말피 투어 때 폭우가 쏟아졌는 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절묘하게 딱 비가 멈추었다. 아름다움을 감추려고, 더 소중하게 감상하라고 비가 내렸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날씨는 그렇게 잊지 못할 순간과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여행은 타이밍이고, 이번 기회에 변수마저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여행의 태도를 배웠다.
무탈하게 8일간 3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담아왔다. 앨범과 여행 노트를 다시 꺼내 들고, '두 번째 유럽 여행기'를 써 내려가 보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유럽 여행을 추억할 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다운 여행을 시작할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여행을 더 여행답게 만듭니다. 기대할 수 있지만, 계획할 수는 없었던 뜻밖의 상황들, 그리고 그런 여행의 발견. 계획할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한 여행의 조각입니다. 이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요?
책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 내용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