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느덧 여행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여행 6일 차, 오늘 하루치를 여행하고 나면 이제 단 하루만이 남는다. 흘러가는 시간이 벌써부터 아쉽지만, 남은 시간도 잘 보내겠다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출발할 때쯤, 바로 뒷좌석에 앉은 두 친구분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 앨범 속 사진을 같이 보면서 이야기 나누시는 듯했다.
"이거 자기야, 나야? 누가 보면 우리 자매인 줄 알겠어~", "이거는 내가 잘 찍어줬지?", "나는 자연이 좋아~", "에이 그래도 핵심은 찍어야지~"
오가는 대화 소리에 미소가 지어졌다. 두 분의 대화가 참 귀여우면서도 무해해서 듣기 좋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친구랑 저렇게 '보기 좋은 사이로' 여행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부지런히 이동해서 나폴리 인근에 위치한 '폼페이'에 도착했다. 비 예보가 있어서 날씨가 좋지 않을까 걱정했는 데 다행히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게 눈에 보였다. 유적지에 들어서서는 설명을 들으며 잠시 입장 대기했다. 초입에서 바라본 폼페이는 이색적이면서도 화사했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계획도시였는 데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단 하루 만에 도시 전체가 멸망했다. 화산재로 뒤덮인 도시는 그렇게 천오백 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다. 수백 년이 흘러 수로 공사를 하다가 유적이 발견된 뒤, 대규모 발굴 작업을 거쳐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장해서 '시간이 멈춘 도시' 폼페이에, 고대 로마의 거리에 발을 디뎠다. 가이드님의 설명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관광객의 시선으로 둘러보다 보니 이곳의 아픈 과거를 헤아려볼 정도의 여유는 부족했지만, 한 도시의 문명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시선을 두었다.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어서 그 색감에 계속 시선이 빼앗겼다. 꽃을 눈에 가득 담고, 사진으로도 남기면서 문뜩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었다. 피어난 꽃을 보고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가이드님을 시야에서 잠시 놓칠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던 꽃들을 마음껏 예뻐했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터전과 생활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지로 손꼽히는 데, 그 이유는 도시 전체가 그대로 땅속에 묻혔던 이유에서 라고 한다. 발굴과 복원을 통해 고고학적 유물을 보존하며 당대 생활상을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중 당대 사람들이 이용했던 목욕탕 시설을 관람했다. 온탕, 냉탕, 열탕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2천 년 전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목욕 시설을 갖추고 생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시공간을 초월해서 여행하는 듯 느껴졌다. 자연광이 들어오게, 통풍이 되도록, 바닥의 열기를 가둬서 스팀 작용을 하도록, 그 옛날에 이토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참 놀라웠다.
다음 장소로 이동했는 데 그곳에는 한 사상자의 석고상이 있었다. 엎드린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듯 보였다. 가이드님 설명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자고, 임산부였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 다시 살펴보니 엎드려 배 속 아기를 보호하려는 모습이 그려졌다.
단 18시간 만에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은 데,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존재했을까 싶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 공간에 석고상 하나만 있었는 데, 그 하나로 수천 년의 세월이 느껴졌다.
참고로, 발굴 작업 중 유물과 건축 잔해들은 나왔지만 사상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흙더미에 군데군데 구멍이 있었는 데 그 틈 사이로 석고물을 부었더니, 사람의 형상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래서 작업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한 석고상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출구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 터전들과 공간들을 보며 지나갔다. 완벽하게 복원되지 않은 모습은 상상으로 완성되겠지만, 여행할 땐 단지 2천여 년 전 도시의 땅을 밟고, 그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만이 감흥으로 다가왔다.
"저기 보이시는 게 화덕입니다. 당시에 빵을 구워 먹거나 피자 같은 걸 만들어 먹지 않았을까요?"
"여기는 소규모 원형 극장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을 보고 이야기 나누던 공간이었겠죠?"
가이드님이 빈 상상력의 자리를 채워주셨다.
폼페이 발굴지는 여전히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사실 상상으로 가늠이 안될 긴 시간을 품고 있다. 아주 극히 일부만 관광했지만, 그럼에도 고대 로마 시대를 수 천년이 흐른 지금 짧게나마 그 시간을 여행해 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관광을 마치고 식사를 한 뒤, '아말피 투어'를 위해 장소를 이동했다. 출발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날씨가 조금만 더 견뎌주길 바랐지만, 하늘은 지금도 오래 참은 거라고 말해주듯 그제야 비를 퍼부었다.
아말피 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소렌토 전망대에 잠시 들렀다. 우산을 챙겨 들고 버스에서 내렸는 데 눈앞의 내려다본 풍경은 상상과 달랐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지중해 해안이었을 텐데, 현실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기대했던 장면을 마주하지 못한 아쉬움을 모른 척했다.
잠시 옆을 둘러봤는 데 과일을 팔고 있는 노점이 보였다. 구경 가볼까 해서 갔는 데 그곳에서 뜻밖의 순간을 마주했다. 비를 홀딱 맞고 있는 멋쟁이 레몬과 눈이 마주쳤다. 피식 웃음이 났다.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레몬이 빗속의 노란 햇빛이 되는 순간이었다.
버스는 조금 더 이동해서 선착장 근방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로 선착장이 보였다. 이 풍경 하나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는 데, 분명 오늘의 풍경은 완벽한 모습은 아닐 테였다. 그렇지만 나름 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빗방울, 빗소리, 비바람, 축축한 느낌, 이 모든 게 여행을 방해하려 했지만, 오히려 이 또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언덕 아래로 내려와서 바닷가에 도착했다. 뒤돌아서 본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여기에 푸른 하늘과 하얀 햇살만 있었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른거렸다.
몇 분 뒤 표를 내고 유람선에 탑승하기 시작하는 데,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우산을 접고 유람선 2층으로 조심조심 올라갔다.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비는 완전히 멎었다. 퍼붓던 비가 잠시 가던 길을 멈추었다.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딱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네!"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대변해 주는 표현이었다.
날씨 때문에 오늘 오후는 아쉬움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여행하다 끝날 줄 알았는 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여행했던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간이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비가 오는 것도 여행이고, 비가 오더라도 여행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니 계속되어야 한다!
비가 그친 덕분에 야외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를 느끼며 느긋하게 항해를 즐겼다. 날씨가 화창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충분했다.
배에서 내려서 아말피 시내로 이동했다. 성당이 있는 작은 광장 부근부터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말피가 레몬 생산으로 유명해서 어딜 가나 레몬이 있었다. 상점을 구경하면서 선물용으로 레몬 비누도 사고, 나를 위한 선물로 에코백도 샀다. 노란색을 평소 좋아해서 그런 지, 아말피 마을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보여준 느낌이었다.
골목 끝까지 구경을 마치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서 레몬주스를 마시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레몬주스는 분명 아는 맛이었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더해져서 더 상큼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여유가 곁들여진, 비타민으로 기분이 충전됐다.
아말피 투어를 마친 뒤, 이동하려고 할 때 폭우가 쏟아졌다. 비가 잠시 쉬어가는 동안 때마침 여행을 잘 마쳤다. 신발도 바지도 홀딱 젖었지만, 젖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 또한 추억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다시 버스에 탑승해서 버스는 그 유명한 지중해 연안 아말피 해안 도로를 달렸다.
흐린 날씨에 낭만은 걷혔지만, 부지런히 가는 길목에서 마주한 레몬 나무들에 계속 시선이 갔다. 평소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색감이어서 그런 지, 노란색이 좋아서 그런 지, 보는 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둑어둑한 날씨와 대비되는 노란 레몬이 여행을 밝게 마무리해 주는 느낌이었다.
떨어진 레몬들을 보고는 여행의 끝자락을 실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났던 아말피, 짧은 시간 여행했지만 그 시간은 노란빛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