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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령 May 01. 2024

특별함과 소중함을 구분하는 건

의미 없을지 몰라도 도움이 된다


발행하기에는 부끄러운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에 적어 두었다 가만히 고른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숨 가삐 쓰는 이 글은, 글을 자주 써야 한다는 브런치씨의 등쌀에 못 이겨 적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입니다.



최근 많이 아팠다. 지난달 갑상선에서 5센티가량의 혹을 떼어낸 후로 ‘이렇게 체력이 구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다. 지지난 주에는 턱 아래 임파선 자리가 불룩 튀어나왔다. 침 삼키기도 불편해 처음 혹을 발견해 준 은인 같은 내과에 방문했다. 침샘염이란다. 적당한 항생제와 소염제를 처방받고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약은 떨어져 가는데 통증 범위가 넓어졌다. 치우쳐 있던 통증이 그 반대편에도, 그러더니 입천장에도. 마침내에는 혀에까지 번졌다. 혀에 열감과 알싸함이 돌고, 치흔이 생길 정도로 퉁퉁 붓기 시작했다.


나를 걱정한 지인은 인터넷을 뒤져 [구강작열감증후군]이라는 병명을 찾아줬다. 병명이 있어 좋았다. 나만 이렇게 아픈 게 아니구나, 답이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거였다. 병원 방문을 쉽게 미루는 사람이었는데 도저히 미뤄둘 수 없는 통증이었다. 내 이 병을 잘 고친다는 병원을 찾아 오밤중에 예약했다. 보험도 안 되는 한의원을 예약했다.


기본적인 검사를 했다. 정확한 이름들은 기억이 안 나는데 정상범위에 있는 BMI지수에 비해서, 그리고 가진 키에 비해서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져 있다고 했다. 자율신경계가 안정적이지 못 하고(?.. 상응하는 서술어를 모르겠다) 경직도는 너무 높고 이완도는 너무 낮다고. 총체적 난국이라고 했다. 맘이 번잡했다. 자꾸 왜 그렇게 스트레스가 높냐고 물어보는데 그 질문에 스트레스받았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그 병명.

아닌 것 같단다. 고객을 잡으려는 한방의사는 그 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통증이 있으니 치료를 받고 보약을 지으란다. 안 그래도 되는 건데, 가족과 상의해 본다고, 더 고민해 보겠다고 해도 되는 건데 이상하게 그 마음을 숨기게 됐다. 네네, 성실한 대답과 확신에 찬 질문들만 오갔다. 대충 치료를 받을 계획인 척, 주말에 엄마와 돌아와 보약을 지으려는 의지가 가득한 척.. 뿌려주는 한방 소독약을 목에 뿌리고 결제하고 나왔다.


하루 그리고 두 끼를 꼬박 굶었다. 침 삼키기도 어려웠다. 밤에는 입이 아파 자주 잠에서 깨 한숨을 푹 쉬어 나를 재웠다. 한숨이 아니라 열을 빼는 소리였는데, 아마 가족들에게는 안쓰러우면서 또 동시에 지겨운 한숨으로 들렸으리라. 그럼에도 밥을 먹어야 몸도 나을 궁리를 한다던 그 사람 말에 죽집에 들렀다. 보양죽으로 분리된 전복닭죽을 먹었다. 수술하고 먹은 병원밥도 씩씩하게 먹어냈는데 도무지 숟가락 들 힘이 없으니 신기했다. 아니 사실 속상했다. 그 사람은 파들 거리는 내 손을 감시했다. 정해준 양은 다 먹으라고 했다. 강압의 내용은 괴로웠으나, 그 사람의 강압은 고마웠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넘어가는 음식이 자꾸만 통증부위를 처대니 기운은 더 없어지는 것 같았다. 예민해졌다. 문득 세상에 초록빛이 더해지는 계절이 왔다는 걸 알았다. 안 그런 척, 사실은 안절부절못한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짧토막한 대화들이 느지막이 오가다 이비인후과를 한 번만 더 들려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 사람은 이 동네에 살지 않는데 꼭 계산한 것처럼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이비인후과로 날 인도했다. 병원은 적당히 허름했고 의사가 친절했다.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우체부 아저씨 같았다. (사실 그런 드라마는 본 적 없다) 카메라를 목에 넣기도 전에 아- 벌리고 있는 입을 보고 선생님이 “편도가 너무 심하네요.” 하셨다.


편도염, 세 글자를 검색해 보면 염증 걸린 편도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발갛게 부은 편도에 얼룩덜룩 곰팡이 같은 염증이 퍼져있다. 이것이 통상적인 상태인데, 나는 목구멍에 밥 두 숟갈이 걸린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선생님이 센 항생제를 처방해 줄 건데, 상급병원으로 가야 될 수 있으니 염두에 두라고 했다.




약을 처방받고 가까운 거리를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 사람과 헤어져 문을 쿵 닫고 나니 눈물이 났다.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도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렇게 꺼이꺼이 울다 옆집 아저씨 기침 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 화장실에 갔다.


부은 목을 따라 부은 눈을 보다가 혐오감 같은 걸 느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대한 고민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 말대로라면, 이런 일이 생겨도 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나에게 생기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나.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 속에 당연히 나도 포함이다. 나는 전장 속에서 총알비를 피하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감히]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따위의 말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 걸까?


나는 자존감이 낮다 자부할 수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간다. 앞으로도 대체로 그럴 것 같다. 자존감은 부어 있는 내 편도와 같아서 나의 총체적인 상태에 따라 좋아지기도, 또 나빠지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도 몰래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 같은 오랜 슬로건에 기대어 나를 특별히 여기고 있었다. 정말 [내 삶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면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을 테다. 삶은 세계 속에 있고, 내가 인식하는 세계는 내 삶이 전부라는 사실이 골치가 아픈 거다.


주인공이라는 착각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주연이 되면 누군가는 조연이 된다는 것. 또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악역이 된다는 것. ‘각자의 삶에서 각자가 주인공임을 인정하면 된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 도움이 안 된다. 나는 그런 작품을 본 적이 없다. 한 작품에 여러 주인공이, 또는 챕터마다 다른 주인공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럿 있겠으나, 분명히 한 장에서는, 한 순간에서는 한 주인공의 마음만 알 수 있다. 동시에 저 드라마 주인공 마음을 또는 저 조연이 주인공이 된 편을 내가 알 수는 없다.


주인공의 인생에서 조연은 상대적으로 작품 세계관 안에서 비운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조연보다 럭키하다. 총알이 빗발쳐도 살아남는 것이, 온 지구가 좀비세상이 되어도 싱싱한 인간으로 남는 것이 주인공이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를 외치면 조연의 언럭키함에 삶으로 슬퍼할 수 없고, 주연의 언럭키함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게 된다. 나를 과잉보호하게 된다.


세상은 주인공의 것이 아니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하나의 주인공이 아니다. 세상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무래도 선별보다는 산발(散發) 쪽이 아닐까. 이 넓은 세상에서, 우주먼지들이 일구는 세상에서 자꾸만 나 역시 행인 1 임을 되새길 때 비로소 넓은 세상이 소름 끼치리만큼 넓고 깊게 느껴진다.


오케이, 특권 의식 비슷한 것에서 자꾸 헤쳐 나와야 함을 깨달은 나에게 남은 과제는 무얼까. 소중함을 아는 것이겠다. 나는 소중함을 대체로 특별함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 같다. 사물에게든, 사람에게든, 사건에게든.


소중함은 ‘바 소’, ‘무거울 중’ 자로 구성된다. 한자를 모르는 내가 받아들일 때 소중하다는 것은 ‘어떠한 바를 무거이 여기다-’ 정도겠다.

‘소중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무언가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란다.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의어와 한자들을 보니 소중과 귀중은 값과 관련한 단어인가 보다.

특별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 ‘. 그러니까 특별하다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보통]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특별한 대상이 구별된다는 것이니까.

물론 소중의 의미에서 역시 값싼 것이 있어야 비싼 것이 있고, 가벼운 것이 있어야 무거운 것이 있겠다마는 ‘소중하다’에는 반대가 없다. 안 소중하다(?).. 정도를 억지로 만들 수 있겠다.

특별함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범위가 필요하다. 가령 ’내 애인은 나에게 특별해‘는 가능하겠지만, ‘내 애인은 특별해‘ 속에는 나도 모르게 (니들 애인이랑은 달라)가 담겨 있는 것이라는 것 …


돌아와,

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저울을 가운데 두고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중 무거운 것을 택하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저울 반대편에 무언갈 올리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소중함과 특별함, 사실 이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둘이 어떻게 다른 건지도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둘은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별하지 않지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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