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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12. 2021

“규정 찾아보세요!”

제일 고마운 사람

“규정 어떻게 되어 있어?

이 사람아! 당신은 법과 규정을 집행하는 사람이야.

자네가 규정을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함께 근무했던 상관 중에 늘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었다. ‘군인이 법을 집행한다고?’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공직 생활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법’과 ‘규정’이다.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맞게 공직 사회도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변해야 하지만, 그 기본과 중심에는 항상 ‘법’과 ‘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도 마찬가지였다. MINURSO뿐만 아니라 모든 평화 유지 임무단에는 ‘표준 운영 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s, SOP)’라는 규정이 있는데, 모든 업무는 이 절차에 따라 하게 되어 있다.




팀 사이트(Teamsite)는 항상 누군가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오기 마련이다. 옵서버(Observer) 대부분 개인 자격으로 파견돼 파견 시점이 제각각이고 팀 사이트나 자리 이동도 잦아서, 어떨 때는 ‘환영 파티’와 ‘환송 파티’가 매주 열릴 때도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또 한 번의 ‘환송 파티’가 열렸다. 우리 팀 사이트에 근무하는 옵서버 한 명이 본부 참모장(Chief of Staff) 부관(비서)으로 선발되어 본부에 가게 된 것이었다. 분명 평범한 환송 파티였는데 그의 작별 인사가 나를 당황시켰다.


“고마운 사람이 참 많은데요. 그중 한 대위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에??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지? 나 저 친구랑 친하지도 않은데?’


의아해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마 한 대위 본인도 의아할 거예요.

하지만 한 대위는 내가 물어보는 모든 질문에 ‘어떤 규정(SOP) 어느 부분을 찾아봐라.’라고 말을 해주었고,

거기에는 늘 내가 찾던 답이 있었어요.


한 대위 덕분에 낯선 환경, 새로운 임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는 내가 두 번째 팀 사이트에서 작전장교로 근무할 때 전입 온 옵서버 중 한 명이었다. 작전 장교는 새로운 옵서버가 오면 ‘작전 구역,’ ‘작전 절차,’ ‘비상시 행동요령’ 같은 필수 작전 내용을 교육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친구와 다른 옵서버 한 명에게도 시간을 정해 브리핑 실(Briefing Room)로 오도록 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직실로 가 팀 사이트 스피커로 그들을 불렀다.


“○○○ 대위와 △△△ 대위는 지금 즉시 브리핑 실로 와주기 바랍니다.”


두 차례 방송을 했는데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막 정찰에서 돌아와 피곤하고 졸린 걸 간신히 참고 있던 터라 짜증이 몰려왔다. 숙소를 찾아가 방문을 두드리자 그들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둘 다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15시, 작전 교육! 기억 안 나요??”


지금 생각하면 ‘시차 적응이 안 됐거나 정찰이 처음이라 피곤했나 보다’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도 간절했던 낮잠을 그들만 즐기는 게 괘씸하고 샘났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둘은 미안해하며 브리핑 실로 왔고 교육을 시작했다.


아직도 당시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교관(나)은 화나 있고 두 교육생 모두 비몽사몽한 채 1/3 정도 감긴 눈으로 억지로 따라오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교육을 짧게 마치고 모르는 것 있으면 나중에 물어보라고 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이 되었을 리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것도 작전뿐 아니라 MINURSO 모든 것에 대해. 나중에는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문 뒤에 서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질문을 던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진, 이거는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거는 SOP X 장 중간 정도 찾아봐. 거기에 나와 있을 거야.”


“고마워.”


그렇게 첫인상 때문에, 또 바쁠 때마다 쏟아내는 질문이 귀찮아서 자세한 설명 대신 직접 찾아보라고 규정을 던져 준 것뿐인데. 이 친구는 지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SOP 전체를 외우다시피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 팀 사이트에서 군수 장교 역할을 맡은 덕에 군수와 시설 관련 SOP를 공부했다. 나중에 임무단 본부 ‘계획 참모’ 선발이 있어 그 자리에 지원하기 위해 ‘정보, 작전, 통신’ 분야 SOP를 공부했는데, 안타깝게 선발 자체가 취소돼 버렸다.


얼마 뒤 임무단 본부 군수 참모 선발 공고가 떴다. 첫 팀 사이트에서 이미 군수 장교 역할을 했던 터라 기대가 컸는데, 결과적으로 선발되지 않았다. 나중에 동료가 알아보니 내가 1순위로 추천되었는데, 임무단 본부에 내부 다툼이 생겨 내가 희생양으로 탈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는 공식 이의 제기를 하기 위해 인사와 상벌 규정을 꼼꼼히 공부하게 되었다. (주위의 만류로 결국 문제 제기는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인사, 정보, 작전, 군수, 시설, 통신까지 거의 모든 SOP를 숙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 덕에 갖가지 질문에 ‘SOP 어디를 찾아봐라.’라고 답할 수 있었는데 그게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감사 인사에 무성의했던 내 모습이 오히려 머쓱해졌다.




UN 임무단에서 규정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임무단은 다양한 국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당시 임무단에도 40개국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각이 다르다 보니 때로는 언쟁과 다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 때 중심을 잡아주는 게 바로 규정, SOP이다.


물론 규정이 모든 상황과 질문에 대한 만능열쇠는 아니다. 전쟁터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거나 계획하지 않은 돌발 상황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정의 세부 내용과 취지를 잘 이해하고 중심을 잘 잡고 있다면, 그 상황에 맞게 유연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규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 친구는 ‘축구광’이었다. 쉬는 시간에 항상 위성 TV로 축구를 시청하고, 자신의 SNS 대부분을 축구 이야기로 도배하는 친구였는데. 오래간만에 생각난 김에 우리 ‘축구광’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뭐 더 궁금한 건 없어? SOP 알려줄까?”



집중! 집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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