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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11. 2021

어린 왕자와 ‘펠리컨 16’

“모두들 기도합시다...”


“메이데이(Mayday), 메이데이, 메이데이! 여기는 펠리컨 원 식스. 메이데이!”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주인공이 불시착한 비행기는 아직 사하라 사막에 그대로 있다.




‘섀클턴(Shackleton)’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Avro’라는 회사가 제작한 비행기다. 영국을 제외하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이 유일하게 섀클턴을 도입해 약 30년간 해상 초계용(Maritime Patrol)으로 사용하다가 1984년 은퇴시켰다.


은퇴한 지 10년이 되어 갈 무렵,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아공은 섀클턴을 다시 하늘에 띄우기로 한다. 섀클턴 대부분은 박물관이나 레스토랑에 전시되어 있는 ‘고물’이었는데, 2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1994년 남아공은 섀클턴 비행에 성공한다.


‘펠리컨 16(Pelican 16)’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섀클턴에 ‘펠리컨 16’이라는 콜사인(Call sign)이 주어졌다. 이로써 펠리컨 16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비행 가능한 섀클턴이 되었다. 섀클턴의 고향 영국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들의 에어쇼(Airshow)에 펠리컨 16을 초청했다. 사실 이 초대에는 섀클턴의 부활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흑인 최초로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펠리컨 16와 승무원들은 이미 ‘영웅’이었다. 인파의 환호 속에 웅장하게 날아오른 펠리컨 16은 가봉, 코트디부아르, 포르투갈을 거쳐 영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펠리컨 16은 첫 번째 기착지인 가봉을 지나 순조로운 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번째 기착지인 코트디부아르에서 문제가 생겼다. 섀클턴은 왼쪽과 오른쪽 날개에 각각 2대씩 총 4대의 엔진을 갖고 있었는데, 오른쪽 3번 엔진에 문제가 생겨 엔진을 교체하게 된 것이다. 승무원들은 비행기 엔진을 교체하느라 늦어진 일정을 따라잡기 위해 야간 비행(Night Flight)을 결정한다.


아무도 어둠을 뚫고 코트디부아르를 떠난 펠리컨 16 앞에 더 큰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새벽 1시경, 오른쪽 날개 4번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 엔진의 온도를 낮춰주는 냉각수가 새는 바람에 4번 엔진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조종사는 4번 엔진을 정지시켰다. 그때 창밖을 보던 정비사가 외쳤다.


“3번 엔진에서 불꽃이 보이는 것 같아요!”


코트디부아르에서 교체했던 바로 그 엔진이었다. 조종사가 밖을 내다보자 그새 번진 불꽃은 3번 엔진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다행히 엔진 소화기를 통해 불길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오른쪽 날개에 있는 3번과 4번 엔진 모두를 잃었다.


“모두들 기도합시다...”


어떻게든 펠리컨 16을 착륙시켜야 했다. 조종사는 속도를 줄이고 고도를 점점 낮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여기가 어디인지,’ ‘아래 산이 있는지, 평야가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여기는 펠리컨 원 식스. 메이데이!”


조종사는 조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고도는 60미터까지 떨어졌다.


‘어쩌면 가능하겠어!’


“콰콰쾅쾅쾅! 케케케케켕”


펠리컨 16은 땅바닥에 부딪쳤다. 큰 충격과 함께 쇠를 자르고 가는 듯한 강한 파열음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펠리컨 16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하자 온갖 물건이 쏟아지며 기내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 탈출해!!”


새벽 2시.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자 승무원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찢기고 다리를 삐기는 했어도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비행기에서 탈출한 그들은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큰 원을 만들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마지막 열아홉”


19명의 승무원 모두가 불시착에서 살아남았다. 기적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아무나, 하고 싶은 말 있나요?”


어둠 속에서 주기도문이 흘러나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날이 밝자 참혹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펠러는 부서진 바람개비마냥 휘어져 있고 랜딩기어와 갖가지 항공기 부품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펠리컨 16은 계속 조난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루프트한자(Lufthansa) 502편이 펠리컨 16의 조난 신호를 듣고 세네갈의 구조 센터에 전달했다. 승무원들은 그들의 생존을 알리기 위해 갖가지 물건을 모아 땅에 “19 OK”라는 글자를 만들고, 불을 피워 자신들의 위치를 알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펠리컨 16 상공에 나타난 구조 항공기가 낙하산을 통해 물과 비상식량을 전달했다. 그리고 UN 차량 2대가 나타났다. 그들이 추락한 곳은 모리타니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서부 사하라 ‘아구아닛(Agwanit)’이라는 지역이었다. 펠리컨 16은 원래 모리타니아 상공을 날고 있었는데, 엔진에 불이 붙자 엔진 열을 식히기 위해 바닷바람을 찾아 대서양이 있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서부 사하라에 불시착하게 된 것이었다.


구조 항공기는 인근을 정찰(Patrol) 하고 있던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 아구아닛 팀 사이트(Teamsite) 정찰 차량 2대를 발견한다. 구조팀이 사고 내용을 적은 쪽지를 유리병에 담아 UN 차량 앞에 던졌고, 이를 본 UN 정찰팀이 사고 지역으로 온 것이다.



UN 정찰팀은 펠리컨 16 승무원들을 팀 사이트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승무원들은 현지 폴리사리오(Polisario) 지휘관을 만났다.


“여러분은 우리의 손님입니다.”


현지 폴리사리오 지휘관은 펠리컨 16 승무원들을 자신들의 망명 정부가 있는 알제리의 틴두프(Tindouf)로 초대했다.


아마 남아공 승무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폴리사리오 지휘관을 따라 틴두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팀 MINURSO 본부가 있는 라윤(Laayoune)으로 가, 그곳에서 귀국하는 방법.


펠리컨 16 승무원들은 틴두프 행을 결정한다. 현장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모로코 통제지역인 라윤으로 가는 것보다는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sation of African Unity, OAU)’ 회원국인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은 사하라위(폴리사리오)가 수립한 국가로,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 시절부터 정식 가입되어 있었다. 폴리사리오와 분쟁 중이던 모로코는 이에 반발해 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 탈퇴했다가 2017년에서야 아프리카 연합에 다시 가입했다. *


UN도 그들의 귀환을 돕기 위해 비행기를 내주었다. UN 특별기는 펠리컨 16 주변을 몇 차례 선회한 뒤 틴두프로 향했다. UN 특별기를 통해 틴두프로 간 그들은 폴리사리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알제리 공군의 수송기와 민항기를 통해 남아공으로 귀환한다.




펠리컨 16은 아직 서부 사하라 사막에 그대로 있다. 당시에 ‘펠리컨 16을 남아공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펠리컨 16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근처에 폴리사리오 군 시설이 있어 MINURSO 팀 사이트는 아직도 그 지역에 정찰을 간다. 같은 팀 사이트에 근무한 나도 펠리컨 16을 만날 수 있었다. 펠리컨 16 동체뿐 아니라 추락 당시 항공기에서 떨어져 나간 랜딩기어도 한쪽에 그대로 있다.


안타깝게도 펠리컨 16은 점점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세월의 풍파도 있지만, 누군가 항공기 부품을 떼어가고 있다. 첫 번째 방문했을 당시 온전했던 프로펠러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대부분 잘려나가고 남아있지 않았다.


불시착한 비행기가 사막에 온전히 있는 것도 흔치 않지만 펠리컨 16은 단순한 비행기 잔해가 아니다. 박물관에 있던 비행기를 다시 띄우기 위한 노력,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에 대한 세계의 축하, 영화 같은 불시착과 구조 이야기 그리고 당시 서부 사하라의 분쟁까지. 펠리컨 16은 이 모든 역사의 증인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얼마나 자원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펠리컨 16이 온전히 쉴 수 있도록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펠리컨 16이 없어지면 그 많은 역사의 증인도 사라지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에 잠든 '펠리컨 16'
프로펠러가 부서진 바람개비마냥 휘어져 있다.
3개월 뒤 다시 방문했을 때 프로펠러는 잘려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은 "펠리컨 16의 죽음(The Death of Pelican 16)"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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