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믿고 있던 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서부 사하라에서 귀국해 한참이 지난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이 사건처럼 말이다.
서부 사하라에는 모로코 군이나 폴리사리오(Polisario)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 있다.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흙둑(Berm)을 기준으로 일정 거리 안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곳을 ‘완충 지대(Buffer Strip)’라 부른다.
양쪽 군인이 들어갈 수 없으니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전쟁 당시 모로코와 폴리사리오는 많은 지뢰를 설치했는데, 완충 지대에 들어갈 수 없어 처리하지 못한 지뢰와 불발탄(Unexploded Ordnance)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마디로 ‘지뢰밭’ 이었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다클라’라는 도시에 1박 2일로 행정 정찰(Admin Patrol)을 가게 됐다. 다클라는 서부 사하라 남쪽에 있는 작은 반도(Peninsula)인데, 카이트 서핑(Kite Surfing)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많은 유럽인들이 찾는 휴양지 같은 곳이었다.
7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정찰이라 해가 뜨기도 전인 이른 새벽 팀 사이트(Teamsite)를 출발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사막에서 길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빛까지 없으니 더 어려웠다. 흙둑까지 가서 모로코 군 검문소(Check Point)를 통과해야 하는데, 검문소를 찾을 수 없었다. 1호차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헤매고 있을 때, 뒤따라오던 2호차에서 무전이 왔다.
“현재 완충 지대에 들어와 있다! 오버!”
그랬다. 흙둑 바로 앞은 완충 지대. 서부 사하라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었다.
‘아뿔싸!! 지뢰밭에 들어왔구나!’
최대한 빨리 완충 지대를 벗어나야 했다. 길을 찾기 위해 GPS를 조작하려는 순간, 모래에 반쯤 파묻힌 로켓(Rocket)이 눈에 들어왔다.
‘불발탄!!!’
“정지! 정지!! 불발탄. 차량 멈춰!”
불발탄을 발견하지 못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1호차 운전자가 차량을 계속 달렸다.
불발탄 바로 앞.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온몸이 굳은 채 낮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다행히 불발탄은 바퀴와 바퀴 사이로 빠져나갔다. 정확히는 바퀴와 바퀴 사이로 불발탄을 통과했다. 얼른 사이드 미러로 뒤따라오던 2호차를 확인했다. 2호차도 바퀴와 바퀴 사이로 불발탄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운 좋게 불발탄을 피하긴 했지만 나는 불발탄을 처리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찰 중에 불발탄을 발견하면 돌과 스프레이로 표시해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차량을 멈춰요. 불발탄을 처리하고 가야겠어요.”
“불발탄? 지금 무슨 불발탄이에요! 그냥 가야지.”
나와 다르게 1호차 운전자와 뒷자리에 타고 있던 옵서버(Observer)는 그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른 다클라에서 쉬고 싶은 것 같았다.
사실 이번 정찰의 리더는 나였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다른 무엇보다 임무단 경력이 오래된 옵서버를 선임으로 대우했다. 정찰 리더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찰 리더 자격시험(Patrol Leader Qualification)도 통과하지 않았고 임무단 경력도 얼마 되지 않던 나는 사실 아무 힘없는 ‘인턴’ 같은 존재였다.
결국 선임들의 말대로 불발탄을 남겨둔 채 정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모로코 군인들이 수신호로 길을 알려줘 완충지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다클라에 도착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더 강하게 얘기해서 불발탄을 처리하고 왔어야 하는데...’
오랫동안 선임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얼마 전 불쑥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얼른 쉬고 싶어 불발탄을 지나쳤다’고 생각했는데, 선임들은 ‘한시라도 빨리 완충 지대를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또 다른 불발탄이나 지뢰가 있을지 모르니까. 사실 그런 곳에서 차량을 멈추고 불발탄 처리 작업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완충 지대에 모로코 군이나 폴리사리오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모로코 군이나 폴리사리오에 불발탄의 위치를 알려주면 그들이 최종 처리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완충 지대에 들어갈 수 없으니 위치를 알려줘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내 말대로 불발탄을 처리했다면 정찰팀만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규정과 절차만 생각한 ‘인턴’과 달리, 선임들은 인턴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UN도 안전을 위해 완충 지대에 들어가지 말도록 되어 있었으니 내가 말한 규정과 절차도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는 모든게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그런 곳에서 필요한 게 현장에서의 경험이다. 그래서 MINURSO에서는 임무단 경험이 많은 사람을 선임으로 대우한 것이다. 사실 이건 전 세계 어디나 똑같은데 이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바로 ‘선임의 품격’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