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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07. 2021

현실판 원빈

나는 지금도 7천 원 하는 곳에서 머리를 자른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어차피 짧은 스포츠형 머리 어디서 자르나 별 차이 없는 것 같아 가깝고 저렴한 미용실에 다닌다. 한때 종로 쪽에 어르신들을 상대로 하는 저렴한 이발소가 있다고 해서 출퇴근길에 몇 번 자르기도 했는데,


“이곳은 어르신들 상대로 하는 곳이니, 젊은 사람은 나중에 좀 오소.”


라는 이발소 아저씨의 말에 무안해져 차마 다시 갈 수 없었다.




그마저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자르던 때가 있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물론 시작은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부터였다. 이미 전임자들로부터 현지 상황을 들었던 터라 팀 사이트(Teamsite)에 머리 자를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전기이발기(일명 ‘바리캉’)를 하나 사 갔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의 의외의 단점이 자주 잘라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내 머리는 곱슬기가 전혀 없는 ‘직모’인데, 이발한지 2주 만 지나도 옆머리가 금세 자라 삐죽삐죽 뻗쳐버린다. 처음 서부 사하라에 갈 때 이 부분을 깜빡하고 실수로 이발기를 이사 화물로 보내버렸다. 개인 수하물로 챙겨 갔어야 했는데.


처음 임무단에 도착하면 교육과 행정 처리를 위해 1주일 정도 임무단 본부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이때 머리를 잘랐어야 했다. 또 하나의 실수였다.


역시나 팀 사이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워낙 사막이고 팀 사이트에 있는 사람 모두가 같은 처지라 아무도 남의 머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스로도 잘 보일 사람도 없고 그렇게 며칠, 몇 주를 버텨도 아무 문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사 화물이 임무단 본부에 잘 도착했다. UN 항공편으로 짐을 요청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갈 수도 있는데, 마침 우리 팀 사이트에서 임무단 본부로 행정 정찰(Admin Patrol)을 가는 팀이 있어 동료들에게 이사화물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4일 정도만 기다리면 머리를 자를 수 있다.’


이발기를 기다리며 새로 할 헤어스타일도 생각했다. 사막 오지에 있는 군인이니 약간 거칠고 공격적인(badass) 느낌의 영화 ‘A-특공대’ 주인공 BA 스타일. 새카맣게 탄 피부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문제는 이놈의 부족한 인내심이었다. 본부로 간 행정 정찰 팀이 오기로 한 날, 늦은 오후가 되도록 정찰 팀이 복귀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차량 한 대가 고장 나, 인근 팀 사이트에서 차량을 고치고 하루 이틀 뒤에야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오늘까지만”이라고 버텼던 인내심은 그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팀 사이트에는 공용 전기이발기 한 대가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돌려쓰기도 하고 관리가 잘되지 않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사 화물이 도착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공용 이발기를 집어 들고 윗옷을 벗어던진 채 화장실로 향했다.


“오, 이거 완전 영화 ‘아저씨’의 원빈인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르키소스’처럼, 군복 바지만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탄하며 이발기를 옆머리에 갖다 댔다.


환상은 거기까지였다. 머리가 밀리지 않았다. 관리가 안 된 이발기라 날이 무뎌져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아니라 쥐어뜯는 수준이었다. “으악. 악.,” 고통을 참으며 양쪽 옆머리를 밀었다. 그나마 BA 헤어스타일의 핵심은 면도한 것 같은 ‘빡빡 민 옆머리’였기 때문에 옆머리는 대충 해도 괜찮았다. 나중에 면도를 하면 됐다.


문제는 뒷머리였다. 보이지도 않고 약간 울퉁불퉁한 뒤통수 때문에 면도도 할 수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발기 배터리가 방전돼 버렸다. 겨우겨우 이발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는데 지나가던 동료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뒷머리가 안 보여서. 나중에 배터리까지 방전됐어.”


“아무리 그래도! 차라리 나한테 잘라달라고 하지 그랬어??”


원빈처럼 멋있게 시작한 '셀프 이발'은 뒷머리를 ‘쥐 파먹은 머리’로 만들고 끝이 났다. 머리가 뜯겨 여기저기 붉게 부어오르고 땜통이 생겨 마치 원형탈모처럼 보였다. 누군가 폴리사리오(Polisario) 연락장교가 이발을 잘 한다며, 해결 방법이 없는지 물어보라 했다. 내 머리 이곳저곳을 살펴 본 폴리사리오 연락장교가 말했다.


“이건 방법이 없어요. 머리 전체를 면도하는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셀프 이발’ 실력이 늘어갔다. 나중에는 해외 파병 경험이 많은 프랑스 장교로부터 원 포인트 레슨도 받았는데, 그 뒤에는 거의 진짜 원빈 수준으로 깔끔하게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자 우선 옆머리와 뒷머리를 3mm 날(Blade)로 밀어.


윗머리는 6mm로 잘라야 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윗머리는 앞에서 뒤가 아니라, 뒤에서부터 앞으로 밀어줘야 자연스럽다는 거야.”



“옆머리하고 윗머리 사이에 층이 생기는 건 어떻게 해?”


“그건 6mm 날로 윗머리와 옆머리 경계선을 지지는 느낌으로 살짝살짝 데 주면서 머리 전체를 돌려 깎는 거야. 그러면 숱 치는 가위처럼 머리를 솎아줘서 자연스러워져.”



그렇게 ‘셀프 이발의 달인’은 한국에 온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이발을 했던 것이다.


누군가 “네 뒷머리는 항상 쥐 파먹은 것 같아.”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내가 착각한 모습 / 출처: 다음 영화
사막에 어울리는 Badass 스타일 / 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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