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출입사무소와 서부 사하라
외교부에서 일할 때 통일부와 함께 일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하루는 업무 협조 겸, 견학 차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육로를 통해 남과 북을 다녀와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론 북한으로 넘어가는 절차가 늘 궁금했는데 (물론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번 기회에 현장에서 설명을 듣고 실제 출입 경로를 따라가 보는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 있었다.
방북 절차는 공항 출입국 절차와 비슷했다. 세관 직원에게 짐 검사를 받고 법무부 직원에게 ‘출경’심사를 받는다. 공항이나 항만에서 외국으로 떠날 때는 ‘출국’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북한으로 갈 때에는 ‘출경,’ ‘입경’의 표현을 사용했다.
여권은 사용하지 않는다. ‘출국,’ ‘입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듯이 북한을 방문할 때에는 관련 법(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전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 발행되는 ‘방문 증명서’를 사용하게 된다. 이 ‘방문 증명서’도 예전에는 여권처럼 종이 형태였다고 하는데 얼마 전부터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처럼 플라스틱 카드 형태로 바뀌었다고 했다.
차량을 가지고 방북할 때에는 하나의 절차가 추가된다. 바로 번호판을 가리고 차량 오른쪽에 주황색 깃발을 꽂는 것이다.
그런데, 번호판은 왜 가려야 하는 걸까?
아마도 북한이 우리 번호판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서부 사하라의 모로코가 그랬다.
서부 사하라에는 우리의 휴전선 역할을 하는 흙둑(Berm)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폴리사리오(Polisario)가, 서쪽에는 모로코가 통제하고 있다.
동과 서 양쪽 모두에 팀 사이트(Teamsite)가 있는데, 동쪽 팀 사이트에서는 흙둑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할 일이 종종 생긴다. 가장 큰 이유는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 본부가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데, 행정 정찰(Admin Patrol)이나 각종 회의 참석을 위해서는 흙둑을 넘어야만 했다.
두 번째 이유는 공항이나 항만 시설이 모두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모로코는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에 많은 기반 시설을 구축했는데, 그중에는 공항과 항만도 있었다. 만약 흙둑 동쪽 팀 사이트에 무슨 일이 생겨 철수(Evacuation)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우선 흙둑 서쪽에 있는 팀 사이트로 철수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공항과 항만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떤 이유든 지상으로 흙둑을 넘을 때에는 ‘남북 출경/입경’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Berm Crossing Form’이라는 양식을 작성해야 하는데, 그 안에는 차량 번호, 탑승자 인적 사항, 목적과 같은 기본 정보를 적게 되어 있었다.
흙둑 중간 중간에는 모로코 군이 지키는 검문소(Check point)가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검문소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과 사람을 검문 검색한다. 우리는 UN 소속으로 공식 업무를 수행 중이기 때문에 검문을 받지는 않고, 모로코 군을 만나 ‘Berm Crossing Form’을 넘겨주기만 하면 됐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있었는데, 바로 번호판을 뒤집어 다는 것이다. MINURSO 차량은 모두 양면으로 된 번호판을 부착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MINURSO를 상징하는 ‘MIN’과 차량 번호가 적힌 번호판이 있고, 반대편에는 무슨 뜻인지 모를 아랍어로 된 번호판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흙둑을 건널 때에는 동에서 서, 서에서 동 진행 방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번호판을 뒤집어 달아야 했다.
“흙둑을 건널 때 절차를 설명해 보세요.”
“’Berm Crossing Form‘을 준비해 모로코 군인에게 전달하고 번호판을 바꿔 달아야 합니다.”
“번호판을 왜 바꿔 달죠?”
“MiNURSO 번호판은 모로코 지역에서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정찰 리더 자격시험(Patrol Leader Qualification) 질의응답 시간에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왜 번호판을 바꿔다는지,’ ‘왜 모로코 지역에서 MINURSO 번호판이 유효하지 않은지’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아랍어 번호판이 ‘모로코 외교관 번호판’이라는 것이었다. 모로코가 자신들의 지역에서 MINURSO 번호판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외교관 번호판을 내준 것이었다. 반대로 폴리사리오가 자신들의 통제 지역에서 ‘모로코 외교관 번호판’을 달고 다니게 할 리 없으니, 흙둑을 건널 때마다 번호판을 뒤집어 달아야 했던 것이다.
UN과 외교관 번호판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외교관 번호판이 왠지 ‘폼’ 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UN 차량은 일반적으로 UN 자체 번호판을 사용한다. 그런데 모로코 통제 지역에서 MINURSO 번호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외교관 번호판을 사용하게 한다는 것은, 조금 비약해 말하면 ‘모로코가 MINURSO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이는 UN 평화유지임무(Peacekeeping Operation, PKO) 중립성과 독립성에 큰 영향을 준다. 평화 유지 임무의 3대 원칙 중 하나가 바로 공명성(Impartiality)이다. UN 차량이 자체 번호판을 사용하는 것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립된 평화 유지 임무단이 어느 당사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립적이고 중립적으로 공명하게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UN과 MINURSO도 잘 알고 있다. 매년 발행되는 UN 임무단 보고서에서 이 문제는 계속 제기되어 왔다. UN 본부도 이 문제를 고치기 위해 모로코와 지속적으로 협의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가 근무하는 동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MINURSO의 중립성과 공정성은 큰 상처를 입었다.
과연 ‘모로코 외교관 번호판’을 단 UN 차량을 본 모로코 시민들은 MINURSO를 어떻게 생각할까?
반대로 ‘모로코 외교관 번호판’을 단 MINURSO 차량을 본 폴리사리오는 MINURSO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