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에 갔다가 할인 행사를 하는 스포츠 용품점에 들렀다. 워낙 ‘물욕’이 없어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따라 ‘러닝화’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내가 돈을 허투루 쓰는 사람도 아니고, 러닝화 한 켤레 정도는 괜찮잖아?’
새 신발을 신고 곧장 한강으로 향했다. 새 신발에 흥분해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탓일까? 평소보다 좋은 기록이 나와 들뜬 마음에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 친구가 말했다.
“역시 스포츠는 ‘장비 빨’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유엔(UN) 평화유지활동(Peacekeeping Operation, PKO)에도 ‘장비 빨’이 있다.
파병 전에 나라(정부)에서 많은 걸 챙겨준다. 너무 많이 챙겨줘서 살짝 당황했는데 군대 처음 입대해서 받은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나눠줬다.
먼저 짐을 챙길 수 있는 수화물 가방(캐리어)과 전술 배낭 하나씩을 준다. 그리고 전투복 2벌, 전투화 1켤레, 운동복 세트, 여름 운동복 2벌, 고어텍스 티셔츠부터 위아래 속옷, 운동화, 선글라스, 칫솔, 면도기, 손수건, 양말까지. 심지어 빨랫비누와 두루마리 휴지도 줬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정말 신병 입대해서 처음 지급받는 수준인데, 사실 대충 생각난 게 이 정도다.
거기에 말라리아 약부터 타이레놀, 지사제, 파스, 밴드까지 1년 치 응급 약품을 챙겨주는데, 이게 또 한 아름이다. 서부 사하라에 도착해서는 전임자로부터 위성전화, 우의, 정글 모자를 받았다.
아! 파병 직전에 “武運(무운)・健勝(건승)” 이라 쓰인 무려 “대한민국 대통령” 명의 손목시계도 준다.
한국은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 방독면까지 쥐어 보내지는 않았는데, 오스트리아는 방독면, 심지어 화생방용 방독면을 쥐어 보낸다고 했다.
“모래 먼지 막으라고 주는 건가요?”
“아니요. 라윤(Laayoune)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모로코 경찰이 최루탄으로 제압하니까, 그런 상황에 대비하라는 거죠.”
‘사막 한가운데서 화생방용 방독면이 왜 필요하냐?’는 나의 비아냥거림을 오스트리아 장교는 확실한 ‘명분’으로 받아쳤다. 사막 팀 사이트(Teamsite)에만 있던 나는 시위를 목격한 적은 없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국 군인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분명 배울 점이 있었다.
방독면을 챙겨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정부가 군인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도 MINURSO에 파견된 많은 나라 중에 높은 수준의 지원을 해주는 나라에 속했다.
“우리는 저 캐리어 가방부터 빨랫비누까지 줘요.
지금 온몸에 두르고 있는 것 중에 나라에서 주지 않은 게 없을걸요?
이 시계 안 보여줬나요? 이거 대통령 시계에요. 한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거예요.”
“이것 봐. 이렇게 잘 챙겨주는 나라들이 있다니까. 정말 부러워요.”
대부분 옵서버들은 우리가 나라에서 받는 지원을 부러워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위성전화였다. PKO 활동을 펼치는 곳 대부분이 워낙 ‘오지’이다 보니 불안정한 통신이 늘 문제였는데, 합동참모본부(합참)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개인별로 위성전화 한 대씩을 지급해 줬다.
(영화에 나오는 ‘매직 유성펜’ 만한 안테나를 가진 그 ‘벽돌 전화기’ 맞다.)
팀 사이트에도 UN에서 지급한 공용 위성전화가 몇 대씩 있었다. 정찰을 갈 때 당직실에 들러 팀별로 위성전화 한 대씩 챙기게 되어 있는데, 나는 챙길 필요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옵서버들에게 “우리는 한국 정부에서 나눠준 위성 전화가 있다”고 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들 부러워했다. 물론 긴급하거나 공식적인 용도로만 쓰게 되어 있었지만 가끔 가족에게 짧은 안부 전하는 정도는 눈감아 주었다.
‘굳이 이런 물건들까지 다 챙겨줘야 하나? 장교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현장에 가 보니 이 물건들은 개인 물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걸 깨달았다. 옵서버가 어떤 장비와 물자를 가지고 왔는지는 나라가 자국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장비와 물자의 수준(Quality)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이나 힘(Power)을 보여주는 바로미터(Barometer)였다. 한마디로 평화유지 ‘장비 빨’의 경연인 것이다.
나라에서 부족함 없이 지원해준 덕에 임무단에서 ‘장비 빨’을 원 없이 세우고 왔다. 당시에는 어깨도 으쓱해지고는 뿌듯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누가 비싼 옷을 입었는지 서열을 세우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게 국제사회와 국제기구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평화를 위한 선의와 공동의 목적으로 한곳에 모였지만 그 안에서 서로 비교 하고 경쟁하며 알게 모르게 서열을 나누는 곳, 그곳이 국제기구다.
결국, 평화유지도 ‘장비 빨’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