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마트에 갔는데 우연히 모리타니아산 문어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식사로 데친 문어에 막걸리 한 잔할 요량으로 장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리타니아 알아?”
“모리타니아? 그게 뭐야?”
“나라 이름이야.”
“아하.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아래 있구나.
모리타니아 수도가 어딘지 알아?”
인터넷으로 모리타니아를 검색해 본 친구는 나를 시험하듯 물었다.
“나 아는데! 잠깐만! 뭐였지.....? 나 분명 아는데!”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왜 아는 척해? ‘누악쇼트’ 래.”
친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리타니아 수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슈팅 파티(Shooting Party)” 시간에 머리가 하얘진 것처럼.
팀 사이트(Teamsite)에서 정찰(Patrol)을 갈 때에는 최소 2대의 차량과 3명의 옵서버가 나가게 된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 안전 조치였다. 보통은 4명이 한 팀을 꾸려 정찰을 가는데, 정찰 리더(Patrol Leader)가 그 정찰의 총책임자다. 정찰 리더는 정찰 계획을 세우고, 사전 브리핑부터 정찰 지휘 그리고 결과 보고서 작성까지 모든 과정을 담당하게 된다.
정찰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6주 동안 진행되는 교육 훈련을 마치고, “정찰 리더 자격시험(Patrol Leader Qualification)”을 통과해야만 한다. 신기하게도 이 제도는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만 있는 제도였는데, 자격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마치 인턴이나 수습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휴가도 갈 수 없고, 본부 참모 직위에 지원할 수도 없다.
자격시험은 크게 필기시험, 실기시험, 브리핑&질의응답 세 단계로 나뉜다. 한 단계라도 통과하지 못하면, 시험을 다시 치러야 한다. 필기시험에서는 서부 사하라 역사, 주요 작전, 군사협정(Military Agreement) 등의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평가받게 된다.
실기시험에서는 실제 정찰 계획부터 마지막 보고서 작성까지 전 과정을 평가받는다. 특히 지뢰 지역에서 이탈하는 방법, 긴급 환자 후송 등 상황 대처능력을 함께 평가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GPS 장비, 무전기와 같은 모든 장비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실제 정찰 준비 과정은 영화 “론 서바이버(Lone Survivor)”에 나오는 임무 준비 과정과 거의 똑같다.)
브리핑&질의응답 단계에서는 모든 내용을 발표 자료로 준비해 영어로 브리핑하게 된다. (모리타니아 수도도 이때 공부했던 내용이다.) 브리핑이 끝나면 기존 옵서버들이 갖가지 질문을 던지고 발표자가 답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옵서버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 부분을 가장 어려워했다.
질의응답 시간을 영어로 “슈팅 파티(Shooting Party)”라고 했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왠지 이해될 것 같은 표현이다. 마치 신임 장관이 관록이 붙을 대로 붙은 야당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세례를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각종 규정에 대한 질문부터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당혹스러운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갓 임무단에 도착한 옵서버들에게는 소위 “멘붕”의 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다.
“사막에서 긴급 환자를 후송하기 위해 헬리콥터 조종사에게 풍속과 풍향을 알려줘야 해요.
그런데 풍속 풍향 지시계(Windsock)가 없어요. 어떻게 할 건가요?”
(정답은 “바지를 벗어 작전 차량 안테나에 묶고 바지가 날리는 방향과 정도로 속도와 방향을 가늠한다.”이다.)
잔인한 슈팅 파티가 끝나면 기존 옵서버들은 발표자를 내보내고 투표로 자격시험 통과 여부를 결정한다.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그 옵서버는 자격시험을 다시 치러야 한다.
나도 몇 번이나 당황하고 일부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슈팅 파티를 마무리 지었다.
‘역시 슈팅 파티 쉽지 않네.
비록 몇 개 답 못하고 두어 개 틀리긴 했지만, 설마 자격시험 통과 못하겠어?’
밖에서 기다리던 나는 오만하게도 평가 결과에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리핑실 문이 열리고 나를 불렀다. 짧은 시간이었다.
‘역시. 길게 상의할 것도 없이 금방 투표가 끝났구먼.’
나의 오만과 착각이 산산조각 나기까지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팀 사이트 작전 장교인 방글라데시 출신 아민 대위가 포문을 열었다.
“제가 먼저 시작해도 될까요?
한 대위는 팀 사이트 작전의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특히 지금 담당하고 있는 군수 장교 기본 업무 지식도 틀렸어요.”
‘이거 뭐지?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데...’
가슴은 철렁했고, 브리핑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아민 대위뿐 아니라 다른 옵서버들도 내 실수 이것저것을 지적했다. 머릿속이 하얘져 멍하니 서 있는데, 팀 사이트 부 지휘관인 말레이시아 출신 자이리 소령이 기름을 부었다.
“평가 결과, 한 대위는 자격시험 통과가 어려울 것 같아요.
다시 시험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하는데 얼마나 필요해요? 필요한 시간을 말해 봐요.”
어이없고 화가 나는 건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 소령이 계속 그 상황을 사진 찍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네? 아, 1주면 될 것 같아요.”
자이리 소령의 재촉에 움찔하며 1주의 추가시간을 달라고 했다. 수많은 나라의 장교들 앞에서 정찰 리더 자격시험에 탈락하다니. 너무나 민망하고 어깨에 붙어있는 태극기를 욕보인 것 같아 치욕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자이리 소령이 환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는 외쳤다.
“새로운 파파 리마! 축하해요!
A New Papa Lima! Congratulations!”
(Patrol Leader의 약어 “PL”을 음성 문자(Phonetic Code)로 읽으면 “파파 리마(Papa Lima)”가 된다.)
진중한 분위기에 있던 옵서버들도 폭소와 함께 환호하며 한 명씩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공이 허공을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장난이었어요. 한 대위는 여유롭게 합격했어요.
이렇게 장난치는 게 우리 팀 사이트 전통 이예요!”
그제야 안도하며 기운이 풀린 나는 동료 옵서버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을 다시 봐야 한다."는 말에 얼마나 당황하고 내 표정이 웃겼는지, 팀 사이트 동료들은 두고두고 나를 놀렸다.
“진, 그때 표정 정말 웃겼어.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니까. 하하하.”
“난 심각했다니까. ‘남은 죽겠는데, 세르게이는 왜 사진 찍고 있는 거야?’ 하면서 얼마나 욕했는데. 하하하.”
사실 당시에는 슈팅 파티의 목적도 결과로 거짓 장난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기존 옵서버들의 텃새로만 보였다.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6주가 지나면 마치 서부 사하라에 대해 전부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휴전 상태지만 엄연히 전쟁 지역이고 곳곳에 지뢰와 불발탄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슈팅 파티는 그런 위험한 곳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들을 통해 ‘내가 서부 사하라를 다 아는 게 아니었구나. 한참 배울 게 많구나.’를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잠깐의 방심이 누군가의 생명과 연결되는 이곳에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의미로 마지막에 거짓 장난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꿈보다 해몽인가?
부끄럽기도 하고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모리타니아산 문어 덕에 이제 슈팅 파티도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고맙다. 모리타니아산 문어야.”
그렇다고 슈팅 파티를 한 번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