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사이트(Teamsite)의 하루는 보통 아침 일찍 정찰(Patrol) 브리핑으로 시작해, 보고서 작성과 개인 담당 업무를 마무리하는 오후 3~4시면 얼추 정리된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은 원칙적으로 휴일이 없는 365일 근무였는데, 그렇다 해도 팀 사이트에 사람이 충분하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작전 대기(Standby)’ 상태로 쉴 수 있었다.
일과가 끝나거나 Standby 시간에 무엇을 할지는 전적으로 옵서버(Observer) 개인에게 달려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지만, 역시나 제일 많이 하는 건 운동이다. 전부 군인들이다 보니 각자 체력 관리에 신경 쓴다. 그래서 팀 사이트마다 체육관(Gym) 하나씩은 있는데, 말이 좋아 체육관이지 실상은 안 쓰는 텐트나 컨테이너에 아령과 벤치 몇 개 그리고 작동하지 않는 러닝머신을 가져다 놓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때 열심히 아령 들고 팀 사이트 주변을 뛴 게 효과가 있었는지 귀국 후 체력 검정에서 예전보다 좋은 결과를 내기는 했다.
친한 옵서버와 쉬는 날이 같으면 함께 주변 산을 오르기도 한다. 아무리 사하라 사막이라지만 중간중간에 돌산도 있고 팀 사이트마다 ‘랜드마크’ 같은 산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팀 사이트 주변에는 “루이자(Louisa),” “샤프(Sharp),” “데빌(Devil)” 산이 있었는데,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올라 랜드마크 모두를 정복할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더위에 운동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그런 더운 날씨에서 살아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이나 ‘객기’로 운동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 섭씨 50도에서 매일 운동한 사람이야.”
하는 허세라고나 할까? 더위가 일상인 나라에서 온 옵서버들은 그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낮 시간에 잘 운동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식당이나 브리핑실에서 TV를 보곤 했다.
특이한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옵서버들도 있다. 헝가리 출신 벨라(Bela) 대위와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Sergey) 소령은 사막에서 만난 가장 성실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둘은 항상 무언가를 한다. 우리 팀 ‘맥가이버’ 벨라는 늘 팀 사이트에 고장 난 무언가를 고치기에 바빴다. 반면 세르게이는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었다.
정찰을 다녀오면 보통 낮잠을 잔다. 아무리 에어컨을 틀고 정찰을 간다 해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막에서 몇 시간씩 운전을 하다 보면 금세 녹초가 된다. 그래서 대부분 옵서버들은 팀 사이트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한 두어 시간 자다 일어나 일을 하곤 했다.
내 옆방에 사는 세르게이도 마찬가지였다. 패널(Panel)로 된 컨테이너 숙소는 옆방에서 나는 작은 소리까지 생생하게 전달했는데, 세르게이는 늘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방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그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르게이는 팀 사이트 이곳저곳을 살펴보고는 어딘가에 버려진 장비를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첫 프로젝트는 배구장이었다. 당연히 실내 배구장은 아니고, 원래 연병장처럼 쓰이는 퍼레이드 장소(Parade Area)에 땅을 파 기둥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부어 기둥을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어디에서 찾았는지 모를 흰 밧줄을 바닥에 못질해 배구 코트를 만들었는데, 사막에서 뚝딱 뚝딱 만든 것치고는 쓸 만했다. 배구장이 완성되고 세르게이는 한동안 오후 5시만 되면 팀 사이트 스피커로 방송을 했다.
“모두 나오세요! 배구 시간입니다!
(Everyone, it’s a volleyball time!)”
배구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이 떨어질 즈음 세르게이는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농구대와 풋살장. 역시나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를 철판을 바닥에 깔고, 망가져 창고에 처박혀 있던 농구 골대를 고쳐 농구대를 만들었다. 팀 사이트 밖에는 라인을 치고 골대를 세워 풋살장을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풋살장은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이고 쓰이지 못했는데, 경기에 뛰었던 옵서버 대부분이 전반전도 끝나기 전에 탈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온도가 섭씨 48도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오케이. 사막에서 축구는 아닌 것 같네. 다음부터 하지 맙시다!”
내가 기억하는 세르게이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분수’였다. “사막에서 분수를 만들 수 있어?” 의아할 수 있지만, 세르게이는 멋지게 해냈다. 땅을 파 수도관을 연결하고 돌을 모아 원형 기단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쳐 분수대를 만들었는데, 척박한 땅에서 토목기사도 아닌 일반인이 만든 것치고는 꽤나 그럴싸했다. 물이 귀한 사막에서 분수를 항상 틀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외부에서 손님이 오거나 날이 너무 더울 때 잠깐잠깐 틀어 더위를 식히곤 했다.
“세르게이, 러시아 공군에서 무슨 특기라고?”
“통신”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걸 그렇게 잘해?”
“아무것도 안 하면 심심하잖아.”
나도 마침 운동도 재미 없어지고, 주변 산도 웬만큼 정복해 본 터라 세르게이처럼 팀을 위한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 남기고 싶었다.
팀 사이트에서는 위성을 통해서만 TV를 볼 수 있었는데, 모래바람이 잦다 보니 위성접시나 케이블이 흔들려 TV 수신이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2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은 밖에서 위성접시와 케이블을 조금씩 움직이고, 다른 한 명은 TV 앞에서 화면이 나오는지 지켜보다가 무전으로 “나온다! 나온다! 고정시켜!” 외쳐 TV를 고치곤 했다.
헝가리 출신 벨라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다. ‘맥가이버’ 벨라답게 바로 해결책을 들고 왔다. 최적의 위성접시 방향을 잡고 그 위치 그대로 콘크리트를 부어 접시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위성접시에서 사무실까지 연결된 케이블을 플라스틱 보호관에 넣어 땅에 파묻었다. 사실 별것 아닌 작업인데,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곳에서 땅을 파고 케이블을 묻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당직을 서고 있던 브라질 출신 카를로스(Carlos) 대위도 손을 더했다.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사무실 TV를 켰다. 흔들림 없는 선명한 화면에 우리 모두 환호했다.
“Yeah!!!!”
“됐어!!! 맥주나 한잔하러 갑시다!”
벨라와 나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도 뭔가 했네?”
“그러게.”
지금 팀 사이트에 있는 옵서버들은 벨라와 나 덕분에 끊이지 않은 선명한 TV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까?
숙소 한가운데 있는 분수는 세르게이 작품이라는 것을 알까?
당연히 모르겠지. 하지만 현재 팀 사이트의 모습도 분명 내 기억 속의 팀 사이트와 많이 다를 것 같다. 또 다른 세르게이, 또 다른 벨라가 팀 사이트를 바꿔 놓았을 테니까.
그렇게 사막의 시간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