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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09. 2021

보이지 않는 손

직장에서 일할 때 본부나 본사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일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도 크게 다르지 않다. MINURSO는 임무단 본부 참모 자리를 공개 선발했는데, 모든 나라가 본부에 자국 출신을 한 명이라도 더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다툼도 잦고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도 했다.


보통 국제기구에서는 국가별 분담금 순위가 직원 선발에 영향을 미치는데, MINURSO에서는 국가별 파견 인원이 더 중요했다. 분담금을 걷는 조직이 아니라 국가별로 인력을 파견 받아 운영되는 인력 중심 조직이다 보니 분담금보다는 ‘인원’인 것이었다.


이를 ‘국가별 균형(National Balance)인사’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 국가에서 10명을 파견했는데 National Balance 상한이 20% 라면, 그 나라에서는 총 2명까지만 본부 참모 직위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원칙이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많은 인력을 파견한 나라일수록 본부 참모 선발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본부 참모 자리가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업무뿐 아니라 생활이나 복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컨테이너 숙소에서 1주일에 한 번 냉동식품 위주의 식자재를 공급받는 팀 사이트(Teamsite)와 달리, 본부 참모는 인터넷 빵빵한 호텔에 살며 삼시 세끼 뷔페를 먹을 수 있었다. 또, 하루 종일 힘들게 사막을 정찰하는 대신 쾌적한 사무실에 앉아 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뉴욕의 UN 본부와 직접 소통할 기회도 많은 만큼 국제정치를 공부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기회였다.


나는 총 2번 본부 참모 자리에 지원했다. 첫 번째는 ‘계획(Planning) 참모’ 자리였는데 갑자기 선발이 취소돼 버렸다. 취소 과정도 석연치 않았지만 원래 작전이나 계획 업무를 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두 번째는 ‘군수 참모’ 자리였다. 첫 번째 팀 사이트에서 군수 업무를 담당했고 무엇보다 한국 공군에서도 ‘군수 특기’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더더욱 욕심이 났다.


나까지 총 3명이 최종 후보(Short list)에 올랐다. 최종 후보에 오르면 필기시험, 군수처장 면접, 참모장(Chief of Staff) 면접까지 총 3단계의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참모장 면접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선발을 예상했다.


“다들 한 대위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

미리 축하해요.”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지원자마저도 내 선발을 예상했다. 다른 동료들도 내가 “1순위로 추천됐다”라고 들었다며 축하를 건네 왔다.



설레발이 문제였을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나는 선발되지 않았다. 나도 아니고 나에게 축하를 건넨 후보도 아닌, 다른 후보가 선발되었다.


팀 사이트 동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맥주를 들고 모였는데 거기에서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의아했던 동료 하나가 평소에 친한 참모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것이었다.



내가 1순위로 추천된 건 사실이었다. 필기시험 결과 내가 근소한 차이로 2등을 했는데 면접 과정에서 참모장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해 1순위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갑자기 작전처장과 군수처장 사이에 싸움이 났다.


같은 시기에 작전 참모 선발도 있었는데, 작전처장은 이미 자국 출신 후보를 자신의 참모로 선발해 놓은 상태였다. 군수처장 역시 내가 아닌 자국 출신 후보를 군수 참모에 앉히고 싶어 했다. 한 참모 부서에 같은 국가 출신을 2명 이상 두지 않는 것이 MINURSO 관행이었는데 두 처장 모두 관행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작전 참모는 당신 국가 출신을 선발하는데, 왜 군수 참모에는 내 국가 출신을 선발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합니까? 참모장이 결정한 일인데.”


“군수 참모에 내 국가 출신을 선발하지 못하면, 작전처도 안돼요. 반드시 문제 제기할 겁니다.”


한참을 싸우던 두 사람은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해질 묘안을 생각해냈다.


“잠깐만. 한 달만 있으면 ‘항공 연락 장교(Air Liaison Officer)’를 선발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임무단에 조종사(Pilot)는 한국군 ‘이 대위’ 밖에 없잖아요?


National Balance 상 한국은 본부에 1명밖에 올 수 없는데, 한 대위와 이 대위 둘 다 본부에 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오! 맞아요!

‘항공 연락 장교’는 반드시 조종사여야 하니, 이 대위 선발 때문에 한 대위를 선발할 수 없다고 합시다.”


사실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 ‘항공 연락 장교는 반드시 조종사 출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실제로 조종사 아닌 장교들도 그 자리를 거쳐 갔지만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참모장이 이를 알 리 없었다.


그들의 묘안은 통했다. 참모장이 그 논리를 수긍했고 ‘항공 연락 장교’에 한국인을 뽑는 대신 이번 군수 참모는 군수처장과 같은 나라 출신을 선발하기로 한 것이다.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한 결론이었다. 참 영리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는 추천 1순위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탈락했다. 만약 팀 사이트 동료가 참모장 비서를 통해 알아보지 않았다면 ‘왜 떨어졌는지?’ 평생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뒤로 본부 참모 자리에 지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계획’대로 한 달 뒤, 나와 함께 파병 간 조종사 선배가 ‘항공 연락 장교’에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기구란 원래 그런 곳이다. 아무리 현장 임무라고 해도 MINURSO도 UN의 축소판이다. ‘세계 평화’라는 원대한 포부와 사명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만 모였을 것 같지만, 개인의 이익을 찾아 그곳에 온 사람도 많다. 그걸 나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내 나라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이 되셨던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그곳을 “정글”이라고 표현했을까. 겉으로는 아닌 것 같이 행동하면서도 막후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곳, 그런 정치와 외교가 난무하는 곳이 바로 국제기구다.


이럴 때는 그냥 ‘내 자리가 아니었나 보다.’ 하고 “인샬라”를 되뇌면 된다.


*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는 의미의 아랍어



함께 올릴 마땅한 사진이 없었는데, 모래에 갇힌 작전 차량이 마치 내 상황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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