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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26. 2022

10월의 제주 올레길

“너는 뭐 볼 게 있다고 제주도를 그렇게 자주 가니?”


어머니는 늘 물어보신다. 나는 못해도 1년에 2-3번은 제주도에 오는 것 같다. 오늘도 혼자 생각할 일이 있어 즉흥적으로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은 제주 공항에 내리자마자 연신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남들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서 가는 곳이라지만, 나에겐 잠시 쉬고 싶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아무 준비 없이 언제든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가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제주에 발령을 받으시면서 방학마다 제주를 찾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에서 자란 내게 딱히 고향이라 부를만한 곳이 없다. 그런 나에게 어릴 적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낸 제주는 고향처럼 느껴진다.


두 번째는 내가 성인이 되어 실연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연히 찾은 곳이 제주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제주 올레길이 막 조성되던 때였는데, 홀로 걷는 제주 올레길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혼자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집 앞에 놓인 귤 봉지와 "주인이 없을시 돈은 우체통에..." 라는 안내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무인점포가 많이 생겼지만 지금처럼 CCTV가  흔하지 않던 당시에 서울이라면 무인점포가 가능한 일이었을까?


길을 걷다 막다른 길다다랐다. 길 끝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과 중년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할머니께서 내게 손짓하며 “앉았다가 가라.”라고 하셨다.


"벗도 없이 어떻게 혼자 다니나?"


제주 방언 때문에 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씀의 요지는 이거였다. “벗도 없이 어떻게 혼자” 이 표현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이렇게 ‘올레길’을 걷고 있노라” 했더니 어르신은 “그런 게 있냐?”라며 내 '올레길 가이드북'을 유심히 보셨다.


한동안 할머니와 대화를 하며 쉬다가 다시 길을 걷기 위해 어르신께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귤 한 봉지를 내미셨다.


"심심할 텐데 가면서 먹어."


"아이고 어르신 아닙니다. 저 먹을 것 있습니다."


사양하는 내게 할머니는 굳이 귤 한 봉지를 쥐어주셨다.


"그러면 제가 어르신 사진 하나만 찍어도 될까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싶었다. 큰 DSLR 카메라를 본 할머니는 기자냐고 물으시더니 사진 촬영을 허락했고, 나는 할머니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아직까지 여행 사진 폴더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지만, '주소를 여쭤보고 왜 사진을 보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올레길 가이드북에 소개된 고기 국숫집을 찾아가 국수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때는 채식을 하기 전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여기까지 와서 혼자 소주를 먹나?”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혼술’이 걱정되셨는지 주인 할머니는 나에게 물어보셨다.


“어릴 적에 제주에 살았고, 다시 와보고 싶어 왔다”라고 하자, 주인 할머니는 마치 고향을 찾아온 손자처럼 나를 기특하게 생각해주셨다. 저녁이 되도록 숙소도 안 정했다고 하니, 근처 숙소에 전화를 돌리며 빈 방이 있는지 대신 알아봐 주시기도 했다. 가게를 떠날 때 주인 할머니는 서울에 올라가는 손자에게 챙겨 주 듯 비닐봉지에 귤을 가득 담아 주셨다.


올레길에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따뜻한 이들을 만나 잠시 현실을 잊기도 했다. 한 번은 어디선가 강아지 2마리가 튀어나와 위로하듯 혼자 걷는 나의 길을 동행해주기도 했다.




나처럼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비행기를 타는 행위 자체보다 ‘새로운 어딘가 또는 지금 내가 속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는 것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도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탑승 12시간 전에 즉흥적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문득 ‘내 첫 올레길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다시 찾아왔는데, 지금의 그곳은 그때의 그곳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 분명 비슷한 골목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무인점포나 골목 끝의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대신 기억 속 제주식 가옥이 아닌 서양식 별장과 숙박시설 그리고 상업시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제주 올레는 여전히 오고 싶은 곳이다. 음악을 들으며 해안도로를 걷다가 문득 이어폰을 빼 보았다. 재잘재잘 거리는 새소리와 현무암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거기에 더해진 바람 소리는 그 어떤 위대한 음악보다 더 한 편안함과 위로를 주었다.


사람과 건물은 바뀌었어도 제주는 그 자체로 제주였고 여전히 나에게 따뜻함과 위로를 주었다. 그래서 내게 제주 올레는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고향 같은 곳이다.


10월의 제주 올레길이란 나에게 그런 의미다.


올레길 4코스 벤치에 앉아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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