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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02. 2021

48시간

“딩동”


침대에서 한창 뒤척거릴 7시 14분, 이메일 수신을 알리는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이메일을 열어 보지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싸늘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았다.


“MINURSO (한국) 군 옵서버 2명 여행 허가서. 예상 출발 일자: 8월 2일”


오늘은 7월 31일. 출발까지 약 48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개인 자격으로 UN 파병을 가게 되면 정확한 출발 날짜를 알기 어렵다. UN 여행 허가서를 받아봐야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는데, 보통은 현재 파견 나가 있는 사람들의 귀국 날짜에 가늠해 출국 일자를 예상해야 했다.


보아하니 나는 광복절을 전후해 출국하게 될 것 같아, 여유 있게 7월 31일에 전출신고를 하고 본가에서 출국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루 전에 갑자기 인사처에서 전출 신고가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해 왔다. 최근, “인사명령”을 낭독하고 그 뒤에 신고하는 방식으로 전출 신고가 바뀌었는데, 아직 UN 여행 허가서도 인사명령이 나오지 않아 전출 신고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선배, 저 어떻게 해요? 내일 출근해요?”


“네가 출근해서 뭐 하겠니? 그냥 사고 치지 말고 장교 숙소에 조용히만 있어.”


출국일이 가까워 오면서 모든 보직에서 물러났던 터라,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출근해도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전 날 대대 장교들과 술을 한 잔하고 아침에 해롱거리던 참에 UN에서 여행 허가서와 항공권이 도착한 것이었다.


최소 1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48시간 후에 출국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여행 허가서 나왔습니다. 오늘 무조건 떠나야 합니다.”


인사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급한 대로 지휘관 참모 회의가 열리고 있는 지휘본부(Top Dais)로 오라고 했다. 부랴부랴 지휘본부로 달려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휘관(단장)이 나왔다.


“필! ㅅ....”


“그래 진아! 얘기 들었다. 얼른 가라! 짐은 다 쌌니? 환전은 했어?”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그래 얼른 가라!”


지휘관은 “필승” 경례가 끝나기도 전에 어깨를 두드리며 내 정신을 다독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기 차를 타고 부대 수송기 탑승 터미널로 향했다. 원래 전출신고를 마치고 대구에서 본가가 있는 수원으로 가기 위해 수송기를 예약해 두었는데, 다행히 아직 수송기가 출발하기 전이었다.


수원에 도착해 곧장 대형 마트로 향했다. 필요한 물건도 있었지만 한국이 그리울 때 먹을 음식을 사야 했다. 가끔 먹겠지만 1년 치를 한꺼번에 사다 보니 양이 적지 않았다. 계산원이 흠칫하며 “무슨 즉석식품을 이렇게 많이 사냐?”고 물었다.


집에 도착해 화물 운송 업체에 다음날 짐 수거를 예약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에 병원과 은행에 들러 일을 보고 콜센터에 전화해 휴대전화 정지도 예약해 두었다. 오후에는 화물 운송 업체가 와 짐을 수거해 갔다.



허둥지둥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출국까지 1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36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작별 인사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하고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이 파일 열어봐.”


나에게 혹시 사고가 생겼을 때 가족들이 당황하지 않게 이것저것 정리 한 내용을 파일에 담아 누나에게 전해 줬다. 일이 생겼을 때 도와줄 가장 친한 동기와 친구 연락처와 함께.


“이게 뭐야...


갖고만 있을게. 열어볼 일 당연히 없을 테니까.”


한동안 답장이 없던 누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또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지?’


마지막으로 최근에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나 내일 출국해. 너한테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잘 지내.”


“생각보다 빨리 가서 당황스럽네. 조심해.”


“그러게 나도 갑자기 출발하게 되서 당황스럽네.”




정신없는 48시간이 지나가고, 어느새 나는 서부 사하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로맨스가 시작됐다.


정신없이 싼 짐은 인수분해가 되어 서부 사하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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