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느낄 때 Feat. Speaking
미국에 십오 년 살면서 어느 한순간 영어 실력이 늘은 건 아니다. 그리고 이만하면 잘하지 싶다가도 꼭 좌절되는 경험을 한 번씩 하게 돼, 난 왜 맨날 이 모양일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나중에 깨닫게 된 건 영어 실력의 향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상승 곡선이 아니라 계단형이란 사실이다. 그냥 맨날 똑같은가 싶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내가 이 정도였나 나 자신이 대견하다가, 또 맨날 똑같은 거 같고. 이런 사이클이 반복됐다.
영어공부는 인풋도 중요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영어를 실제로 써 보는 연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듣고 읽는 게 인풋이라면, 쓰고 말하는 것은 아웃풋이다. 작문과 스피킹의 차이점은 수정 가능성과 타이밍 두 가지에 있다. 작문은 시간을 충분히 갖고,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수 차례 수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스피킹은 대화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반응해야 하고, 내뱉은 말을 수정하기 위해 대화를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영어 실력 중 스피킹이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순서가 가장 마지막이다. 이 글은 아웃풋 중 순전히 말하기에만 국한되는 내용이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긴 한데, 미국인과 대화할 때 시기적절하게 내가 알고 있는 표현들이 나와주지 않는다면 절반의 성공일 따름이다. 되돌아보면 이제까지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그때 이 표현을 썼어야 하는데, 한발 늦은 후회 아닌 후회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목표가 미국 직장에서 미국인 동료와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업무에 관한 원활한 의사소통이었다면 별 문제를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영어로 대화할 때,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 즉 내 전공 분야를 영어로 말하는 게 가장 쉽기 때문이다. 본인 영어 실력이 좀 딸린다고 느끼시는 유학생들 가운데 학위 마치고, 미국 기업과 인터뷰하고 뽑혀서 잘 다니는 경우도 많다. (물론 전공과 하는 일에 따라 편차가 심한 건 사실이다)
나처럼 영어를 제2 언어로 배운 사람이 멀쩡한 미국 직장 잘 다니고 업무도 잘하지만 막상 어렵다고 느껴지는 게, 이웃집 파티에 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랑 수다 떨며 이야기하는 거다. 영어로는 이걸 small talk이라고 한다. 똑같이, 직장 내에서 업무 관련 이야기 말고 동료들이랑 신변잡기적인 이야기하는 데 어울리기 힘들고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테크 컴퍼니 구성원을 보면 사업 부서에 따라 현지인보다 이주민의 비율이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원어민이 쓰는 영어랑, 영어를 제2 언어로 배운 사람들끼리 하는 영어는 조금 다르다) 심지어는 동료들이 하는 대화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적인 대화일수록 문법 상관 안 하고, 슬랭 같은 걸 많이 쓰기 때문이다.
물론 교환 학생이나 유학 온 젊은이들 가운데 친구들 잘 사귀고 함께 어울려 잘 노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현지인과 관계를 유지하며 사귀는 거다. 한국에서 모임 같은 데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가 현지인처럼 영어를 잘해야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아이들 과외 활동을 하면서 만난 학부모들과 함께 학부모회 일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뻘쭘하지 않고 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원어민 수준 영어로 그들과 대화를 해 나갈 정도의 실력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다니는 회사에 취직을 한 후에도 동료 직원들과 업무적인 관계 이상 개인적으로 친해지긴 위해선 그냥 '영어를 하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왜냐하면 대화라는 게 재밌고 편해야 자주 하게 되는 것이지, 불편하고 재미없으면 그 자리를 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건 언어만 안다고 되는 건 아니다. 현대 영어가 전달하는 뉘앙스와 미국인의 사고방식, 그리고 미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2010년 이후 한국어는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의 영향을 받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난 한 때 '기레기'라는 단어를 오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일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운다고 가정했을 때, 기레기라는 신조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 역사에서 언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해가 쉽고, 더 나아가 그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공부 역시 미국 문화와 사회를 안다면 더 수월해진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자신 있게 사용하기 쉽지 않다. 자고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 것처럼 아는 만큼 들리고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난 삼십 대 중반 미국에 온 사람 치고 액센트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broken English (한국말로는 콩글리쉬)를 쓰면 액센트가 없어도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분들 발음 중시하는 걸로 아는데, 별로 안 좋은 발음이더라도 제대로 영어 하는 편이 더 낫다. 미국엔 전 세계에서 이민 온 수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데 , 그중 억양이 특히 강해서 영어를 알아듣기 힘든 사람들이 인도 사람이다. 정말 액센트 심한 인도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을 정도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액센트가 좀 있어도 영어를 제대로 하면 미국인은 신기하게 알아듣는다. (하긴 내 친구 이야기 들어보면 자긴 네플릭스 쇼 <The Crown> 시청할 때 영어 캡션 켜야 한다고 했다. 브리티쉬 액센트 알아듣기 힘들대나 어쩐대나......)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는 이상, 이미 다른 언어를 습득한 상태에서 제2 언어로 영어를 배우게 된다. 그 말은 읽고 쓰는 걸, 듣고 말하는 것보다 먼저 배우게 된다는 의미다. 듣기, 읽기, 쓰기가 향상되는 건 가시적이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빠르게 따른다. 하지만 스피킹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노력한다고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거 같지 않고, 발전의 속도도 매우 더디게 느껴진다. 일상생활 가운데 '스몰 토크'는 별로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고 수다 떠는 것이기에 내가 머릿속에 문장을 구성하고 말할 때쯤이면 사람들은 이미 그 주제를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경험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내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등 영어를 꽤 잘한다고 느낀 후에도 경험했을 만큼, 일상에서 미국인과 물 흐르듯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원어민과 똑같진 않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피킹 할 때 머릿속에 문장을 구성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말이랑 똑같이 입을 열면 자연스럽게 영어가 나오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간혹 가다 말이 좀 안 된다는(does not make sense) 걸 깨달아도 당황하지 않고, 창피해하기보다 그냥 빨리 정정하는 여유 또한 생겼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과 노력이 들긴 했지만, 아줌마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