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리치 Aug 21. 2023

마음도 몸과 같다.

면도하는 전업주부(퇴사) #13

진수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커다란 화면 속 작은 창에서는 타 부서와 전쟁 중이다. 1시간 뒤, 진수는 밖으로 나간다. 11월 초겨울, 나무는 앙상해졌고 바람은 낙엽을 굴리고 있다.


- 아직 진료 중이라서, 10분 정도 기다려주세요.

- 아,, 네..


진수는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수도 눈치채지 못하게 10분은 흘러갔다.


-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육아휴직 복귀한 지 약 1년이 넘었다. 진수는 치료되지 않았다.


- 어떻게 지내셨어요?

- 회사가 힘들어요. 회사가 지옥 같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힘들어요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 그건,, 한 순간을 찾기가 힘든데요.

의견을 이야기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 그래요. 혹시 회사 밖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어요?

어렸을 적이나...

- 누구 앞에서 발표할 때, 너무 긴장을 합니다.

- 그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 혼날 것 같은 느낌?

- 어디서 느껴지나요? 머리 아니면 가슴?

- 가슴에서 느껴집니다.


스무고개처럼 의사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진수는 원인이 무엇인지 이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의사와 혼자서 묻어놓았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막힌 가슴이 틔어지는 느낌이 든다.


최현경 정신마음건강 전문의.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에도, 육아휴직을 갔다 온 지금에도 그녀는 계속 여기에 머물르며 진수와 이야기한다.


그녀는 서랍에서 작은 인형을 꺼내 진수 앞에 둔다. 인형은 아버지가 되고, 인형은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진수의 누나도 된다.


-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하셨어요?

- 화를 내셨어요? 세탁기가 이상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계속 그러냐고..

- 그때 진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어요?

- 억울했어요. 세탁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을 뿐인데..


'아빠 때문인가?' 진수는 생각했다. 거절을 못하고, 의견을 내면 혼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빠 때문인가? 어린 진수의 모습이 현실과 과거를 넘나 든다. 억울했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가 통하지 않고, 의견은 곧 질타로 돌아왔음을 그것도 아빠로부터.. 진수는 생각했다.


진수의 눈앞에 작은 인형이 보인다. 아빠였다.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아빠와의 관계. 공간은 단절되어 있지만

관계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 감사합니다.


진수가 진료실을 나와서 익숙하게 간호사 앞으로 간다.


- 7일 치 약 처방전입니다.

- 네, 감사합니다.


진수는 아빠와의 관계는 회사동료와의 관계임을 눈치챘다. 몸도 커지고, 성인인 진수는 여전히 아직도 10살 아이의 모습이 직장 안에서 남아있다. 진수는 자신의 자리를 보았다. 그 자리에 지금의 진수가 아닌 10살 진수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나오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해서, 부탁하지 못해서 진수는 스스로 닫아버렸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왜 그러는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늘 그렇듯,, 좋은 인상을 보이려고, 성실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늘 웃었고, 속으로 삼켰다. 진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지만, '누르면 나오는' 것처럼 좋은 모습만을 보였다.


- 오늘 빨리 퇴근할 수 있을까?


아이폰 즐겨찾기에 있는 민진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그만둔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생명은 느닷없이 오는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