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하는 전업주부(퇴사) #14
- 하아.
진수는 속으로 '좆됐다'라고 생각했다. 데이터가 어제 변경한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진수한테만 컴퓨터가 '너 좆됐어'를 속삭인다.
-대호야.. 잠시만..
4년 후배인 대호가 변경한 프로그램이었다.
대호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3초간 정적이 흐른다.
- 어떡하냐...
- 네...
속으로 '좆됐다!!'를 100번 즈음 외친다. 그 뒤에 '어떡하지'가 따라온다. 대호에게 시켰지만 진수 또한 같은 작업을 한다.
- 이거 묻자.
- 네에...
- 괜찮을 거야..
그렇게 진수는 또 한 건의 리스크를 가슴에 묻는다. 진수는 이렇게 묻다가 내가 터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대로 묻는다.
- 대호야, 커피 한 잔 할까?
- 지금요? 그래요..
진수는 대호와 사이가 좋다. 그렇게 포장한다. 사실 진수는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 좋은 선배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늘 그를 칭찬한다. 그는 뱀과 같다. 진수는 자신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참는다. 그렇게 내키지도 않지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진수는 애쓰는 중이다.
-계산해 주세요.
진수는 편의점에서 카페라테 2잔을 사서, 편의점 뒤편으로 간다.
-안녕하세요~
편의점 뒤편은 굴뚝이다. 회사 안에서는 금연구역이기에 많은 직장인들이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담배를 피운다. 편의점 사장에게는 회사 내 금연규정이 행운이다. '칠성사이다'가 붙어있는 플라스틴 탁자와 의자가 여러 개 있고 의자에 얼굴은 알지만 친하지 않은 회사동료들이 가득 차 있다.
대호는 담배를 꺼내물더니 불을 붙인다. 진수는 10년 전에 끊었던 흡연욕구가 올라오지만 이제껏 참아왔던 게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 음,, 괜찮겠지?
-......
-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
진수가 불안하니 혼자서 이야기한다. 평안한 대호의 담배 피우는 얼굴을 보니 짜증이 났지만 진수의 표정은 웃고 있다. 머릿속에는 온갖 데이터들이 리스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진수의 얼굴은 편안하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찾지 못해 회사생활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진수는 아직 모르는 눈치이다.
'김 과장, 잠시 내 자리로, '
체리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자리에 앉아마자 메신저가 깜박인다.
'하아.. 씨...'
메일 한 통도 읽지 않았는데 바로 부장님 호출을 받는 것은 뒤통수를 맞는 것이다. 뭐라도 한 줄 읽고 나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을 텐데, 부장님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진수는 알고 있다.
- 네, 부장님
- 공정팀과 코웍하는 일이 있는데, 진수가 해줬으면 해.
- 네?
역시난 처음 듣는다.
- 어떤 일이에요?
- 네한테도 메일 갔을 텐데?
- 저 이제 출근...
'씨발' 진수는 욕이 늘었다. 단지 속으로, 진수는 나름 타 부서에 평이 좋다. 왜냐하면 웬만하면 다 해결해 주고 스스로 일을 맡아하는 스타일이다. 온순하고, 핑계되지 않는다. 그런 평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속으로 하는 욕이 늘어난다.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지금도 일이 많은데 또 다른 프로젝트에 들어간다는 사실로만으로도 화가 난다.
- 부장님, 이번 달까지 개발 프로젝트 마쳐야 해서,
이것까지 하기가..
- 음,, 그럼 적임자가 누구야?
'아,, 씨.. 뭔 소리야? 그건 네가 골라야지!!!' 진수 안에 또 다른 진수가 말한다.
- 대호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장님
- 결정도 해야 하고 발표도 해야 하는데.. 대호는 안돼..
'아,, 진짜, 지금 대호랑 나랑 둘이서 일하는데... 그럼 누굴 골라? 왜 맨날 나야!!!' 또 다른 진수가 말한다.
- 진수 너 밖에 적임자가 없어..
- 하아,,, 네 알겠습니다.
진수의 최대한의 거절은 한숨이다.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당장 내일부터 회의 참석해야 한다. 정말 하기 싫은 발표도 해야 한다. 벌써부터 진땀이 난다. 미팅자리에서 의견 내기도 싫고, 서로 잘난 척하는 의견도 듣기 싫었다. 진수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어졌다.
- 민철아,, 차 한잔 하러 가자..
- 네, 선배님.. 요거만 끝내고 메신저 드릴게요.
3년 후배 민철이하고는 같은 팀에 있었지만 일하는 분야가 달라서 친하게 지낸다. 역시,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친하게 지내는 게 직장 내 국룰이다. 민철이하고는 회사 밖이야기가 잘 통해서 자주 커피를 마시러 간다. 주로 주식과 같은 투자이야기를 하고, 회사에 매여있는 삶을 원하지 않아서 잘 통한다.
- 최부장님 때문에 미치겠다. 대호랑 나랑 둘이서
일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공정 프로젝트
못하겠다고 하니깐 적임자가 누구래? 바보 아냐?
- 하하하.. 선배님하라는 뜻이죠.
- 와아... 진짜 나랑 안 맞는다.
민철이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진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회사 주변을 걷는다. 이제 겨우 10시 반, 퇴근하려면 아직 멀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지, 과연 진수가 재미있어하는 일이 있는지 진수는 민철이의 주식이야기를 들으며 한동안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 내년에는 그만두고 싶다.
- 왜요? 밖에서 할 거 찾고 나가야 돼요.
- 그건 맞는데... 이렇게 우울증 약 먹으면서
회사 다니는 게 힘들다.
- 주식공부합시다..
- 그르게.. 요즘 보는 종목 있어?
사무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른다. 끈적거리는 커다란 괴물 같은 엘리베이터 입구가 양갈래로 벌어진다. 진수는 5층을 누른다.
- 점심 나가서 먹을까?
- 그러시죠.. 선배님, 아까 말한 종목 팔아서
제가 살게요..
- 아니야, 괜찮아. 내가 살게..
진수는 자리에 앉아서, 이제야 공정 프로젝트 메일을 열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