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준 Oct 02. 2021

8개월치 레바논 짐싸기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4월 18일(일)


짐을 싸는 것은, 그것도 긴 여정을 앞두고 본인의 짐을 꾸리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일로 다가올 수 있고,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설렘 가득한 일일 수 있다.


짐을 싼다는 것은, 그러니까 그 물건을 챙긴다는 것은, 이 물건을 그곳에서 어떻게 쓰리라 가득 기대할 수 있는 일종의 상상 타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30kg만 허용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만약 약 300 여명이 8개월 간 살아내야할 짐을 가지고 한번에 이동을 해야해서 무게의 공정함이 필수적인 조건이 될 때, 말하자면 복도 중앙에 전자식 저울을 설치하여 모두가 잴 수 있게 하며, 단 1g의 오버도 허용하지 않고, 무게가 기준을 패스 해야만 짐이 실릴 수 있으리라 군수과가 엄정히 공표하였을 때는, 그것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된다.


 잠시만, 혹시 내가 그 8개월의 여정의 장소가 한국 물품을 구하기 힘든, 그니까 썬크림이고 라면이고 스팸과 참치 캔, 내 영혼을 살찌워 줄 종갓집 배추 김치, 하다못해 원하는 책까지도 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분쟁지역이라는 것은 언급하였나?(나중에 와보니 PX 가 있고, 도서관에 책들도 많다. 또한 알고보니 각각 전임자가 후임자들에게 물건들을 물려주는 파병지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바디워시와 샴푸를 물려준 24진 통역장교에게 감사함과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다른 전임자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파병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나와 대부분은 계속해서 물건들을 넣었다 뺏다 하며 무게를 재고 또 재었다. 언제까지? 끝날때까지.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등 여러 말이 있다.

글쎄 내가 느껴본 바로는 '무엇을 버리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무엇을 사느냐가 아니다. 버리느냐이다. 처절하면 할수록, 쥐어짜면 쥐어짤수록 더 기름기 없이 담백하게 알 수 있다.


이사할 때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은 다 필요한데 그 가운데 버리는 정말 실전이니까.


우선 무엇을 버릴까. 일단 여분의 전투화. 비가 잘 오지 않는 지역이니 비가 와서 급하게 전투화 하나의 여분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주말을 이용하여 빤다고 할지라도 중동지방이면 빨래가 금방 마를 것이라는 계산에 과감하게 하나를 반납했다.


 다음은 세면도구 일체. 혹시 몰라 여유롭게 챙긴 분량들이 있다. 여분의 수분크림과 영양크림, 태닝하고 바르려고 했던 알로에 3통 중 1통을 나눔했다. 샴푸, 바디워시는 두 달 뒤에 레바논으로 해상 재보급이 도착한다고 치면 일단 두 달은 비누로 견딜 수 있다. 샴푸와 바디워시만 빼도 무게를 많이 줄였다.

일교차가 커서 밤과 새벽에는 춥다고 챙긴 후리스가 있다. 그땐 돌아다니지 말고 방에 있자. 후리스를 버렸다.

넉넉히 싼 스팸도 한달에 한 번, 마지막 주 금요일에만 한 먹자. 지난 한 달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혼자만의 스팸 의식을 만들자. 딱 8개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두었다.


처음에는 1,2kg의 싸움에서 나중에는 10~20g의 싸움으로 점점 싸움은 피 말려져 갔다. 분명히 말하건데 10~20g의 싸움이 맞다. 상징적 의미로서 쓰인 숫자가 아니다. 혹시 성인남성 기준 대부분의 팬티가 40g 정도 인 것을 대한민국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나.


팬티는 딱 5장만 챙긴다. 금요일 출근 전 아침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빨래를 한다면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끼는 책을 두고 가는 것이었다.

육사 생도 1학년 때 중대 4층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자서전 '결정의 순간, Decision Point.' 대통령으로서 함께 일했던 각료들의 인품이나 겉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이 탁월하여 후에 글을 쓸 때 주위의 사람들을 묘사할 기회가 있으면 참고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장본의 경우 무게가 1kg으로 여행용 서적으로는 굉장히 탁월하지 못한 중량이다.


이어서는 좋아하는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더 잡.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의 특성은 정말이지 주인공이 상상할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을 친다. 그리고 항상 뜨거운 샤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한 뒤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모습에서 항상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동명부대에도 도서관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모르겠으나 있다고 하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몇 권 있지 않을까 라는 판단에 이 두권의 책을 아쉽지만 도서관에 기부하였다. 기부라기 보다는 그마저도 아까워서 도서관 책장 중 가장 구석에 숨겨두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포기하지 못했나?

우선 엄마의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과 스타벅스 캡슐은 포기하지 못했다. 한 10년은 된 것 같은 정말 구형 머신이기에 굉장히 크고 무겁다. 족히 3kg은 되어 보였다. 머신만 가져가면 되냐. 스타벅스 캡슐도 100여개 챙겼다. 25사단 소위 시절 파주시 적성면과, 3사단 철원 토성리 정보장교 시절 이 커피는 나로 하여금 강남 선릉역 일대를 산책할 수있게 해주었다. 정보학교 동기에게 빼앗은 스타벅스 텀블러도 나의 감성에 도움을 줄 것이다.


선물 받은 책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와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특강을 챙겼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는 이미 4번 정도 읽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이 나온다. 작가가 경험한 것들을 모으고 재단하여 거기에서, 그 하나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삶 전체를 어우를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끄집어 낸다는 것과, 그 과정이 부드러웠던 것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오마주의 수준은 바라지도 않고 그 플롯만이라도 따라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져왔다. 선물 받으면 더욱 아끼고 잘 가지고 다닐 것 같아 부탁하여 파병 전 선물로 받았다.

 

이상의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도저히 바람막이 전투복, 체육복 무게가 나오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직전 똥과 오줌을 다 쌀터이니 그 무게만이라도 더 챙길 수 있게 해주어라. 아니면 지금부터 내일 탑승전까지 밥을 먹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목구멍까지 내려왔다.

차라리 이럴거면 몸무게도 재야하는거 아니냐.


잠시만 몸무게? 그래 몸에 지니면 된다.


팬티를   껴입으면 주말에 빨래를 해도 된다.  위에 체육복을 입고 후리스를 입으면 버리지 않아도 된다.  위에 전투복을 입고 바람막이를 입으면 다소 덥겠지만, 일단  수는 있다.


나의 천재적인 발상에 이어서 외투 주머니와 전투복 바지에 짐을 미친듯이 넣었다. 그렇게까지 해야하냐라는 군수과 실무자의 절규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적인 감정은 없다.


드디어 딱 5g의 여유를 두고 합격했다. 늦은 밤 12시에 큰 업무가 끝났다.


초등학교 국어시간 꽃신 신은 원숭이 이야기가 기억난다. 처음에는 맨발로 잘 다니다가 옆에 누군가가 꽃신을 공짜로 주었다. 예쁘고 발이 편하여 신고 다니다가 나중에 꽃신을 주지 않자 맨발로 다니는데 발이 너무나도 아파서 이제는 꽃신이 없으면 걷지도 못하고 비싼 돈을 주고 꽃신을 사 신는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사는데 이렇게나 많은 물건들을 필요로 하는구나. 이것들이 없으면 안되는 약한 존재로 변하였구나.

많은 소유물로 점점 약해져왔구나.


가질수록 약해지고 버릴수록 독립적이다. 소유가 없으면 책임이 없어져 자유로운 마음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법정스님. 제가 경험한 것은 맥락이 다르긴 한데, 혹시 이것도 무소요의 역리이나이까?

이전 01화 본대의 소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