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여자주인공 윤진아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이런 말을 건넸다.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윤진아의 남자친구인 이규민은 세상 찌질한 놈이다. 찌질한 상대에게 너의 어떤 모습이 싫은지, 어떤 모습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나였다면 구구절절 말했을 것이다. 맞닿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보다 상대를 탓하는 건 가장 쉬우면서도 비겁한 일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윤진아가 더 멋있어 보였다. 나와 다른 선택,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었다. 헤어짐의 인사가 마지막까지 이렇게 달콤할 수 있구나 하면서. (물론 그녀가 달콤한 말을 건넸다고 해서 상대도 달콤한 말을 내뱉진 않았지만)
사람에 반하는 시간은 상대적이다. 어쩔 땐 첫눈에 보자마자 호감이 생기기도 하고, 지그시 기다리다 상대의 온기가 자연스레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지고 나서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 마냥 모든 시선이 사랑하는 이게로 향한다. 그때부터 집중할 때 입술을 뜯고 있는 손, 귓불에 있는 볼록 나온 작은 점, 잠들면 버릇처럼 까딱거리는 발가락마저도 사랑스러워지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 전과 후의 온도가 이리도 다르다니. 사랑을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지기도 하다니.
뜨거워진 사랑은 결과를 남긴다. 서로에게 적합한 온도가 되면 결혼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속 공주와 왕자의 결말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시간이 흐른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은 영원할 것처럼 서로를 믿으며 시간이 흐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므로 함께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므로 함께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도 우리의 흘러간 시간에는 있다. 이미 지나간 일이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엔 결국 당신을 사랑했던 과거의 나만 남았다. 내 사랑의 결말을 아직 모른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거고, 결혼을 후회하느냐, 물으면 그것도 ‘그렇다’라고 말할 텐데 이제 나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그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 달콤하던 것들이 뜨거워져 단내가 나게 됐다. 혀끝에 맴돌던 단어들도 고인 가래를 뱉지 못하고 결국 삼켜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동화책의 아름다운 결말에 샘이 난다. 거짓으로 살아가는 삶도 존재하게 된 나에겐 그와 행복을 꿈꾸는 것도, 그와 오래 살아가는 것도 무감각해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이 먹을수록 부부는 정으로 살아간다 말한다. 혹자는 의리로 살아간다 말한다. 그들의 관록에는 나 같은 경험들도 모두 포함되는지 궁금하다. 세상 달콤한 것들을 전부 먹어보고 이제는 미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그래서 더 이상 맛있는 것은 없다 말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달콤의 반대는 씁쓸일지도, 아니 어쩌면 살벌일지도. 폭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남자주인공의 따뜻한 말과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며 이제는 허상 속에 살아간다.
+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헤어짐을 고하는 날, 당신도 이규민처럼 지긋지긋하게 매달린다면 내 입에선 단 맛이 날까요? 쓴 맛이 날까요? 아니면 아린 맛이 날까요? 당신은 사랑이었죠. 사랑이 미움이 되고, 사랑이 증오가 되는 건 순간이었어요. 사랑이 무관심이 되고 결국 사랑이 없어져버린지 오랩니다. 당신은 사랑이었죠. 내뱉은 이 말도 이제 보니 과거형이군요. 당신과의 시간은 참 예쁘고 달콤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