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학벌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을 '학벌 세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물론 대학원 진학의 주된 목적은 학위 취득, 연구 수행 또는 연구자로서의 경험이겠으나,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출신 대학보다 더 '이름 값'이 높은 대학으로 진학하고자 한다.
학문적으로 전통이 있는 유럽에서는 석사/박사 학위가 자격증보다는 수련증에 가깝기 때문에 어떤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대학의 유명세보다는 어떤 교수가 어떤 연구를 하느냐가 대학원생의 진학 여부를 결정한다. 미국은 유럽보다 학문적인 전통이 부족하지만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많은 명문대가 존재하고, 일반인에게 유명하지 않더라도 특정 연구 분야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이 있다. 또한 학계에서 권위 있는 교수라고 해서 모두 하버드, MIT 등에 재직 중인 것이 아니라 본인의 연구 분야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에 재직 중인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석사/박사 학위가 자격증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직업을 구할 때는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유럽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유명세보다는 어떤 교수의 연구실로 진학할 것이냐가 대학원생의 더 큰 관심사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연구 수준이 세계적으로 상승하면서 설포카(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가 아닌 다른 대학에 재직 중이며 뛰어난 성과를 내는 교수가 종종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종합 대학으로써 각 대학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길 뿐 각 분야별 순위는 경시되고 있다. 또한 취업 시장에서도 매우 유명한 지도 교수나 연구실이 아닌 이상 대학의 '이름 값'이 갖는 가치가 더 높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산업화 시대를 거쳐오면서 국가 주도로 연구 분야들이 발전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의 전통있는 명문대에서 교수를 했던 1세대 ~ 1.5세대 연구자들은 과거에 국가 지원을 받아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왔거나 해외에서 자랐으나 실력이 매우 뛰어난 연구자여서 스카웃된 사람들이다. 즉, 당시 전도유망한 연구자들은 명문대 위주로 배치되었고 그들 밑에서 좋은 연구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며, 결국 회사들도 경력 채용으로 박사급 인력을 뽑으려면 명문대 위주로 우대해주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국가 주도로 연구 인력이 개발되던 시기가 지나고 나서부터 많은 능력있는 사람들이 설포카가 아닌 대학들에 재직 중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구 수행은 결국 교수가 아닌 대학원생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훌륭한 연구 성과를 위해서는 인재 확보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대학원에 진학할 사람의 수는 계속 줄고 있고, 여전히 취업 시장에서는 설포카가 우대되며, 대학원 진학자들이 수도권 생활을 선호하면서 설포카를 제외한 웬만한 대학들은 대학원생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즉,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에서 학부를 졸업한 학생들도 더이상 모교로 대학원을 진학하지 않고, 서울에 있는 주요 사립대나 설포카로 진학하고자 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학벌 세탁' 또는 '학벌 상승'을 위해 설포카로 진학한 대학원생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석사 또는 박사 학위 취득 후 대기업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 이력서, 연구 포트폴리오 등을 먼저 채용팀에 제출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지원자에게 요구되는 기재 사항이 '최종학력'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지원자는 '최종학력' 이전에 그가 거쳐온 '학력'들도 기재하고 대기업 채용팀에게 검토를 받아야 한다.
과거 사회적으로 '학벌'을 타파하고자 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공채에서 '학벌'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고 있다. (물론, 지원자가 제출하는 성적표만 보더라도 무슨 대학을 다니는지는 알 수 있기에 실질적으로 기업이 학벌을 고려하느냐 마느냐는 믿음의 영역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블라인드 채용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대기업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지면서 근로자에게 요구되는 기술의 수준은 올라가고 있고, 그에 따라 공채는 점점 줄어들며 경력채용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중요한 점은 경력채용의 경우 앞서 언급한 지원자의 자기소개서, 이력서, 포트폴리오 등을 요구하는데, 이때 지원자의 학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원자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어떤 대학을 나왔든지 상관없이 기업은 '최종학력'만 설포카에다가 좋은 연구실 출신이면 뽑아줄까? 약 30분 동안 각각 진행되는 기술면접, 임원면접, 인성면접으로(총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 소위 기업에서 말하는 '우수한 인재'를 가려내기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각자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도출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대학원 과정 동안 피나는 노력을 통해 많은 성과를 이뤘다면, 대기업 뿐만 아니라 정출연(정부출연연구소)나 대학교수까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피나는 노력과 많은 성과는 모두 수치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나 열심히 공부했어요', '나 열심히 연구했어요' 등과 같은 말은 의미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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