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심리학 개론 수업이었는데 내 전공을 알고 “정신분석 공부는 어떠냐?”라고 묻는 분이 있었다. 내 옆에 있던 동기가 대뜸 “그쪽 전공보다 훨씬 난해하고 어려워요!”라며 끼어들었다. 질문한 사람도 머쓱하고, 나도 황당했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가볍게 한 질문에 상대방의 전공을 무시하고 우월한 척하는 태도에 내가 다 부끄러웠다. 자신의 공부에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면서까지 공부의 자격이 따로 있는 것처럼 구는 짓은 겉멋이 든 하수나 하는 짓이다.
나도 그런 ‘공부 뽕’에 취해있진 않은 지 돌이켜 보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약 5년 전 한 인문학 아카데미의 철학 수업을 통해서이다. 철학 선생님을 인생의 스승이라고 혼자서 생각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 사립 문과대학 출신의 변변찮은 스펙을 가진 30대 여자’라는 열등감에 휩싸여 있어서 철학을 공부하는 내 모습이 뭔가 ‘있어’ 보였다. 대학원 동기가 “나 취미로 정신분석 공부하는 여자야!”라고 떠벌리고 다녔다더니 내가 그 꼴이었다.
철학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날은 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객관적이고 냉철한 평가를 들을 때는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초조해져서 공부를 즐길 수가 없었다.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원을 고려해 보라”며 스치듯 지나가는 선생님의 조언 한 마디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대학원에 가면서 철학 수업을 관뒀다가 니체 수업을 한다길래 다시 수강한 적이 있다. 니체의 책을 읽고 짧게 감상을 남기는데 철학 선생님이 “니체를 신격화하고 있으며 철학을 대단한 목적으로 미화하고 있다”라고 혹평을 했다.
선생님은 “철학과 일상은 다르지 않다”라고 늘 강조하던 분이다. 나도 모르게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철학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빠져 철학을 우상화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계속 마음에 걸려 선생님께 잘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메시지로 보냈다. 선생님은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니 멀리 보고 길게 가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몇 년 뒤 논문을 쓰고 석사를 졸업한 시점에 돌이켜보니 이제 좀 이해가 간다. 공부하고 싶은 목적을 달성한 자신이 스스로 대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부를 해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면 헛배운 거다. 소위 말하는 가방끈이 길어서 오만하고 아집이 센 사람은 가장 피해야 할 부류다. 자신의 공부만 특별하다는 착각이 시야를 가리고 타인과 거리를 두게 한다. 공부를 통해 지식은 채울 수 있어도 지혜는 채울 수 없다.
그럼, 대체 공부의 목적이 뭘까?
나에게 공부란 열등감이라는 결핍을 채우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나를 성장하게 하는 매개체다. 공부가 나의 모자란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 줄 수는 없다. 대신 모자라면 모자라는 데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온전히 나답게 만드는 수단으로 공부를 택했다.
예전에는 공부를 통해 완벽해지기를 기대했다면 지금은 단 1%라도 성장을 바란다.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데 자꾸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힘들었다. 나이 들어서 하는 공부는 남과의 경쟁이 아니다.
애초에 완벽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처음에는 내 모습이 싫어서 바꾸고 싶은 줄 알았다. 내가 기대하는 환상 속의 모습 말고 현재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완벽’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컵에 물이 반만 차 있어도 충분히 갈증을 해소할 수 있듯이, 부족함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완전함을 인정하고 나면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성장은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내 안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공부의 목적이다.